“밤 낮으로 번 돈을 모두 소외계층의 품으로…” 테스형도 인정했던 무명 가수 ‘너훈아’ 의 슬픈 생전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어요..

대체 무엇이 원조의 삶이고 무엇이 짝퉁의 삶일까요?

자신의

꿈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남을 봉사하며 살았던 인생에 오직 주인공의 이름 석자만이 빛날 뿐입니다.

오늘은 이것을 말씀드리기 위해 글을 작성합니다.

나훈아의 삶을 조사하는 와중 나훈아의 모창 가수로 알려진, 고인이 되신 ‘너훈아’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폐암 투병 끝에 2021년에 세상을 떠난 김철민 님의 형이자 짝퉁 나훈아로 널리 알려진 가수 너훈아.

 

이분의

삶을 알아갈수록 많은 생각이 들었는데요.

“정말 무대와 노래를 사랑했던 사람이었구나, 그리고 남을 위해 봉사하셨던 분이셨구나, 하지만 한과 비애도 참 많은 인생이었겠다”

 

 

그 누구보다 진지하게 자신의 꿈과 열정을 가졌던 한 인간, 평생 2집을 꿈꿨던 1집 가수 김갑순에 대해서 시작합니다.

그의 한과 비애가 조금은 풀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너훈아의 본명은 김갑순입니다.

1957년 논산시 양천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박수갈채를 받는 가수를 꿈꿨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의 어머니는 전 재산과 다름없는 소 한 마리를 팔아 그의 꿈을 지원해 줬고, 1988년 자신의 이름인 가수 김갑순으로 대표곡 명사십리가 포함된 그의 첫 앨범을 드디어 세상에 내놓습니다.

그러나 앨범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고, 그는 오랜 무명 생활에 들어갑니다.

한마디로 쫄딱 망한 그는 어머니가 있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갔고, 어느 날 우연히 나훈아 모창대회에 나가 금상을 수상하며 그의 제 2의 가수 인생 ‘너훈아’로 시작하는 계기를 맺게 됩니다.

더 정확히는 1990년대 초반 개그맨 고 김형곤 씨의 권유로 무명가수 김갑순이 너훈아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나훈아를 따라 하는 익살스러운 그의 표정과 제스처 뒤에는 하루 50곡 이상 나훈아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디테일한 나훈아의 습관까지 놓치지 않았던 피나는 그의 연습이 존재했습니다.

비록 김갑순의 이름으로는 불러주는 무대가 없어 오르지 못했지만, 너훈아의 이름으로라도 그가 사랑하는 무대를 오르기 위해 그는 자신이 가진 최대한의 노력을 30대 중반부터 너훈아가 된 김갑순은 25년간 너훈아로 바쁜 나날들을 보내게 됩니다.

 

그는

생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나훈아는 아니지만, 무대에 서면 나훈아를 찾는 팬들이 나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느낀다”

그렇게 그는 나름의 자부심을 갖고 나훈아를 만나기 어려운 이들에게 찾아가 그의 노래와 무대를 통해 관객들에게 자그마한 즐거움을 선사했습니다.

하지만, 25년 너훈아의 삶이 마냥 즐겁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밤무대 공연을 할 때면 만취한 손님들이 그를 향해 술병을 던지고 ‘네가 나훈아냐? 넌 짝퉁 나훈아야. 무대에서 당장 내려와’ 이렇게 야유와 폭력을 행사할 때도 많았습니다.

본인 이름인 김갑순으로는 불러주는 무대가 없기에 그가 사랑하는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너훈아’의 삶을 차선책으로 택했던 그에겐 ‘짝퉁 나훈아’라는 조롱은 항상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한 번은 밤무대 사회를 보던 친한 지인이 그를 소개할 때 ‘짝퉁 나훈아’를 소개하여 10년간 등을 진 적도 있을 정도였죠.

 

그는

짝퉁 가수가 아닌 모방 가수라는 가요계의 한 존재로 늘 인정받으려 노력했습니다.

하루 3~4개 스케줄을 소화할 정도로 바쁜 삶을 보냈던 그에게 2012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찾아옵니다.

간암 3기 판정, 4년간의 시한부 선고.

그는 이 시한부 선고를 받고 덤덤하게 다음과 같이 지인들에게 얘기했습니다.

“죽을 땐 죽더라도 무대 위에서 노래하다 죽겠다”

 

그리고

그의 말처럼 그는 한 공연 중 쓰러져 병원에 입원을 합니다.

 

 

그러나 지적 장애인 보호시설에서 너훈아의 얼굴만이라도 보고 싶다는 요청에 그는 힘든 몸을 이끌고 무대에 오를 정도로 소외 계층을 위했고, 의지가 있던 남자였습니다.

어려운 이들을 돕기 위해 지적 장애인 보호시설에서 불렀던 그 무대가 결국은 그의 마지막 무대가 되었습니다.

이외에도 2005년에는 산불 피해 지역 주민들을 위해 다른 후배 모창가수들을 모아서 위문 공연도 나설 정도로 봉사적이었던 그는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양로원을 짓고 독거노인을 봉양하며 살고 싶다’라는 바람을 밝혔습니다.

이런 김갑순의 이타적인 훌륭한 성품은 그의 친동생인 김철민 님에게도 이어집니다.

 

김철민

역시 대학로 버스킹 공연으로 얻은 수익을 소년소녀 가장돕기와 무의탁노인 돕기 등에 기부하며 선행을 이어오던 사람입니다.

김철민은 그의 형의 노래에 대한 열정과 한과 비애가 담긴 친형의 유언장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희 형은 투병 중에도 마이크를 놓지 않았습니다. 복수에 물이 차서 튜브를 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들을 찾아온 지인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항상 노래를 불러줬는데, 늘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형은 떠나기 전 이렇게 제게 말했습니다”

‘나는 평생을 가짜로 살았지만, 너는 너의 이름으로 된 가수가 되어라’

그 마지막 유언이 자신에게 가수의 길을 걷게 한 이유였다고 그가 밝혔습니다.

굳센 삶의 의지를 갖고 힘든 항암치료도 동시에 같이 견디며 말이죠.

당시 동생 김철민 또한 폐암 판정을 받아 투병 생활을 함과 동시에 봉사 활동을 하며 남은 이들에게 행복을 주는 훌륭한 사람이었죠.

안타깝게도 동생 김철민 씨는 2021년 12월에 세상을 뜨고 말았지만, 형에게 이어받은 의지를 충분히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너훈아는

공연 전 이렇게 관객들에게 위트 있는 멘트를 통해 분위기를 달굽니다.

“진짜 나훈아가 오려면 여러분 이 공연비는 택도 없습니데이. 그래서 너훈아가 왔으니까. 오늘만큼은 신나게 즐기고 박수 쳐주이소”

그가 친동생에게 남긴 유언을 보며 ‘짝퉁 나훈아’라고 불려진 스스로의 삶에 대한 일종의 비애감과 한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인은 스스로의 인생을 가짜라고 유언장에 말씀하셨지만, 고인의 삶은 짝퉁이 아닌 김갑순의 삶이었습니다.

나훈아의 노래를 누구보다 피나게 연습하며 나훈아의 공연을 볼 수 없던 많은 이들에게 소중한 추억과 즐거움을 줬던 가수였습니다.

평생을 자신의 2집을 꿈꾸던 김갑순, 그의 인생은 오히려 꿈과 열정 없이 살아가는 이들보다 더 뜨겁고 더 예술적이었던 오직 김갑순 이름 석 자만이 빛나던 인생이었습니다.

어려운 소외계층을 도우며 가치 있게 살았던 1집 가수 김갑순 님의 삶이 조금이나마 멋지게 재조명되길 바라겠습니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