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세 현존 최고령 배우 신영균… ” 숨겨둔 그의 재산 수준… 그리고 그가 “이팔청춘” 의 모습으로 회춘하게 된 놀라운 스토리를 확인해보세요..

배우 신영균 씨는 자산이 놀랍게도 무려 3000억이 넘을 거라고 하는데, 그 근거가 무엇일까요?

더 놀라운 것은 구순을 훨씬 넘은 95살인데도 엄청 정정하십니다.

최근

작고한 송해 님보다 한 살 더 적은 28년생인데, 실제로 보면 이팔청춘 같은 느낌마저 있다고 해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그게 가능한지 그의 인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신영균 씨의 고향은 북한인데요.

황해도 평상군 금암면 필대리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1928년 11월 6일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아버지 신태현 님과 어머니 신순옥 님의 차남으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100호가량 되는 작은 동네 면장이자 소학교 이사장이었습니다.

 

나름

부농 집안이었기에 유복하게 자란 편이었어요.

그런데 6살 때 아버지가 병환으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머니가 30대 초반에 홀로 온갖 고생을 다 해가며 삼남매를 키웠다고 해요.

삯바느질, 야채장사, 참기름 장사 등을 하면서 기둥을 잡았죠.

교육열이 높았던 어머니는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하기 위해 10살 무렵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신영균 씨는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니면서 초등학생 때 교회 성극에서 단역을 맞게 되면서 연극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어요.

 

 

중학생 때부터 배우의 길을 모색하기도 했습니다.

연극을 보고 반한 당시 최고의 배우 김승호 씨에게 찾아가 ‘어떻게 하면 배우가 될 수 있냐’라고 물어볼 정도였어요.

 

그는

‘좀 더 공부하고 와라’라고 해요.

훗날 정말 배우가 되어 ‘마부’라는 작품에서 그의 장남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레슬링을 배운 적이 있는데, 같은 도장에 다니는 친구의 아버지가 ‘청춘극장’이라는 극단의 단장이었습니다.

그에게 자신의 연기를 보여주고 그 극단에서 진짜 배우로 활동도 했어요.

너무나 연기를 하고 싶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어머니는 노발대발하며 ‘너 딴따라 시키려고 황해도에서 서울까지 내려와서 공부시킨 줄 아냐’라며 결사반대했습니다.

그러자 몰래 도망쳐서 극단에 들어가 버렸어요.

 

그러나

막상 해보니 너무나 비참하고 경제적으로도 힘들었습니다.

“2년 따라다녀 보니 너무 고생스러워요. 트럭에 세트를 싣고 그 위에 배우와 배우 가족을 태우고 다녔어요. 겨울날 트럭이 쓰러져서 아이들이 깔린 적도 있죠”

그래서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고 연기는 취미로 할 생각을 하게 되었고, 1년 동안 독하게 공부해서 1948년 서울대 치대를 들어갑니다.

 

 

머리가 엄청 좋았던 것 같아요.

서울대에서는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연극부를 만들어서 연극 부장으로 활동했습니다.

1955년 대학을 졸업했는데요.

대학을 졸업하기 전 해군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지금의 아내 김선희 씨를 만납니다.

만난 지 1년 만에 결혼했는데, 김선희 씨는 7살 연하에 이대 정치외교학과 출신입니다.

치과 의사 면허 자격을 따서 1958년 서울 종로에서 치과를 개업해 2년 동안 운영했습니다.

그가 치과를 차리자 인맥이 있던 연극인들이 찾아와 치료를 받았는데, 그에게 연극을 같이할 것을 권유했죠.

연기에 대한 열정을 끊지 못하고 극구 반대하는 아내를 설득해 다시 연극 무대에 서면서 배우로서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의 연극을 보고 영화 ‘과부’의 감독이 캐스팅을 하게 되어 그는 1960년 32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영화배우로 데뷔했어요.

연극 무대를 통해 다져진 탄탄한 연기력으로 데뷔하자마자 주목을 받았는데, 신문에 ‘서울대 나온 치과 의사가 배우가 돼 멋있게 연기했다’라고 호평이 났습니다.

이듬해 1961년 신상옥 감독의 ‘연상군’이라는 영화로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짧은 기간에 연기파 배우로 인정받았습니다.

1964년 그의 히트작 ‘빨간 마후라’에서 아시아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으면서 국제적으로 통하는 배우라는 인상을 대중들에게 심어주었죠.

 

아직도

회자되고 있는 1968년 ‘미워도 다시 한번’ 시리즈의 주인공을 하며 그 시대의 탑 스타로 군림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인기가 있으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게 찍어댔는데요.

1년에 30편을 한 적도 있다고 해요.

그래서 19년간의 영화배우 활동 기간에 무려 300여 편을 찍었습니다.

이렇게 다작을 하며 모은 돈으로 그는 사업을 합니다.

배우라는 직업을 늘 불안하게 여겼기 때문이죠.

그는 볼링장, 제과점, 부동산업과 호텔업 등을 연거푸 성공시킵니다.

연예계 최고 부자로 손꼽히며 현금만 무려 500억이 있다고 해요.

 

신영균

씨와 비교할 만한 인물로 배우 신성일 씨를 들 수 있습니다.

신영균 씨는 배우 생활을 하며 모은 돈을 착실하게 굴려 연예계 최고의 재력가에 등극했지만, 현역 시절 신영균 씨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던 신성일 씨는 낭비를 해서 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죠.

돌아가실 무렵 딸이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냐’라고 물어보니까, 신성일 씨가 ‘재산 없어’라고 했다고 해요.

신영균 씨는 어떤 과정으로 이런 막대한 부를 축적했을까요?

1963년 친구와 함께 서울 금호동에 동시 상영을 하는 ‘금호 극장’을 인수해서 새로 개관합니다.

이후 ‘명보 제과’를 인수해 이때 부인 김선희 여자가 팔을 걷어붙여 직접 빵을 굽고 장사도 하면서 사업을 키워나갔습니다.

당시 ‘명보 제과’는 ‘뉴욕 제과’와 ‘태극당’, ‘풍년 제과’ 등과 함께 4대 제과로 꼽힐 정도죠.

1971년에는 볼링장을 인수했고, 1973년에는 빌딩 관리 업체인 ‘한주흥산 주식회사’를 설립해서 부동산 임대 사업까지 뛰어들어 영화 배우 못지않은 사업 수완을 보였습니다.

어느 정도 부를 축적하자 영화배우로서 자신의 영화를 원 없이 틀고 싶은 소망에, 자신의 보물 1호라고 할 수 있는 ‘명보극장’을 사들이죠.

1977년 ‘명보 극장’을 인수한 후 외국 영화와 한국 영화를 배급 상영하며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연극

무대에 대한 애정으로 ‘명보 소극장’도 만들죠.

1985년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 지상 14층 지하 4층의 빌딩을 건립하고, 지하 2~3층에 ‘명보 소극장’을 차렸습니다.

1992년에는 한국에 진출하려는 미국 ‘맥도날드사’와 신영균 씨가 함께 49 대 51의 비율로 54억 원의 자본금을 투자해서 서울의 합작 회사인 ‘맥신 산업’을 설립했습니다.

지금은 아들이 한국 맥도날드 사장을 맡고 있죠.

특히 그의 재산 형성 과정 중 신영균 맥도날드와 SBS 서울 방송이 무척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결국 2014년 재벌 닷컴 연예 출신 부자 순위에서 신영균 씨를 1위로 꼽았습니다.

당시 SM의 이수만 씨나 YG의 양현석 씨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고, 당시 신영균 씨 재산은 총 2830억 원이라는 추측이 나오게 됩니다.

지금은 과연 얼마일까요?

신영균 씨가 손대는 사업마다 성공했던 숨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영화에서 맡았던 역할은 주로 든든한 장남, 가부장 등 영화에서의 이미지가 아주 좋았어요.

게다가 남성적인 매력을 가진 미남이었는데도 유혹이 많은 영화판에서 단 한 번도 스캔들을 내지 않아 실제 인생도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이 믿음과 신뢰의 이미지가 사업에도 그대로 연결되어 하는 사업마다 족족 성공을 한 것이죠.

이런 점이 그의 진짜 부의 출처입니다.

이렇게 번 돈을 그는 사회에 환원에서 대한민국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2010년 당시 500억 원 상당의 가치를 가진 ‘명보 극장’과 제주특별자치도 ‘신형 영화 박물관’을 영화계 예술계 공유재산으로 기증해 영화계에 좌우 합작을 이끌었습니다.

2013년에는 모교인 서울대에 발전 기금으로 시가 100억 원 상당의 토지를 기부하기도 했어요.

2019년에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선언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내가 나이 90을 넘었으니 살아봐야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그저 남은 거 다 베풀고 가면서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어요”

“나중에 내 관 속에는 성경 책 하나 묻어주면 됩니다”

재선 국회의원, 한국 영화배우 협회장, 한국영화인협회장, 한국 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장 등 각종 감투도 많이 쓰고 돈도 많이 벌었지만, 대중의 사랑을 받은 것은 모범적인 생활 덕분이기도 했습니다.

2020년 TV 조선에서 진행한 ‘트롯 어워즈’ 심사 위원장을 맡았고, 트롯 100년 심사위원 특별상의 시상자로 나와서 시상을 진행했습니다.

90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정정해서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랬는데요.

그의 건강 장수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요?

신영균 씨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술, 담배는 물론 여자와 도박도 멀리해 왔습니다.

신앙심이 강했던 어머니가 눈물로 아침저녁 기도를 하며 키운 아들이었고, 그녀가 늘 잔소리처럼 했던 ‘탈선하지 말라’라는 말씀을 약속처럼 지켜냈습니다.

 

또한

배우가 될 때 아내가 “치과 의사라서 결혼했지, 배우면 결혼 안 했을 것”이라면서 극구 반대하자, “배우를 하더라도 절대 스캔들 내지 않겠다”라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켰죠.

신영균 씨는 지금도 규칙적으로 삽니다.

오전 10시 서울 명동 ‘호텔28’ 사무실에 출근 하루를 시작하죠.

‘호텔 28’은 영화 촬영장 분위기가 물씬한 부티크 호텔로 ’28’은 이곳 명예회장인 신영균 씨가 태어난 해 1928년을 가리킵니다.

신영균 씨는 예전에 영화 촬영할 때는 피곤하니까 초콜릿, 사탕을 많이 먹었다고 해요.

“40대 중반쯤 되니 당뇨가 왔어요. 그래서 단 음식은 주의하고 매일 오후 헬스장에 가서 한두 시간 정도 가벼운 근육 운동과 런닝머신을 해요”

50여 년 동안 당뇨를 잘 관리해서 특별히 안 좋은 데는 없다고 해요.

너무나 뻔한 얘기지만 술, 담배를 멀리하고 운동을 열심히 하고 바르게 살면 건강한 몸으로 이렇게 장수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놀랍게도 5년 전보다 지금 더 젊어 보이기도 하는데요.

2022년 6월 8일 국민 MC였던 송해 님이 향년 95세를 일기로 별세하면서, 은퇴한 전직 연예인들 통틀어 최고령 타이틀을 이어받았어요.

 

현재까지

현역으로 활동 중인 연예인 중에선 이순재 씨가 87살로 최고령입니다.

이순재 씨 또한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고 바르게 사는 연예인으로 유명하죠.

특히 그는 “젊을 때부터 술을 안 한다. 동료들 보면 술을 많이 한 사람은 60세 전해 갔다. 병 증상, 당뇨나 그런 게 생겨서 버티지 못하고 간 사람들이 많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술, 담배를 많이 한 사람은 빨리 늙죠.

신영균, 이순재 님처럼 훌륭한 어르신들이 오래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아서 후대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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