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곡 ‘향수’를 불러 많은 사랑을 받은 테너 박인수 전 서울대 성악과 교수가 향년 85세로 별세했습니다.
2일
성악계에 따르면 고인은 지난달 28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죠.
유족으로는 부인 안희복 ‘한세대’ 음대 명예 교수, 아들인 플루티스트 박상준이 있으며, 장례는 4일 오전 11시 미국 LA ‘한국 장의사’에서 진행됐습니다.
박인수는 1938년생이며, 어린 시절 매우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했죠.
그의 아버지는 일본 ‘주오 대학’ 법학부에서 유학을 했고, 서울시청에서 운수과장, 도시계획과장, 건설과장 등 요직을 거쳤지만, 너무나 청렴해 자식들 학비조차 제대로 내지 못할 정도로 어려웠습니다.
박인수는 네 살 되던 해에 서울 내수동에서 미아리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당시 미아리는 집이 몇 채 없었고 산과 들, 논과 밭만 있는 전형적인 농촌이었죠.
초등학교 때는 서울 세검정 일대에서 자두, 배 등 과일을 좌판에서 팔았고, 중학교 때는 경기도 수원에서 ‘조선일보’ 신문 배달을 하고, 미군 부대에서 나온 물건을 얻어 팔기도 했죠.
이후
중학교에 입학을 한 뒤부터는 럭비부에 들어가고, 기계 체조도 배우고, 유도부터 수영에 이르기까지 안 배운 종목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싸움 꽤나 한다는 친구들과 어울리게 됐고, 그러다 싸움패인 ‘미아리 오 형제파’를 결성하여, 친구들에 의해 두목으로 추대되어 싸움질을 일삼고 다니면서도, 마도로스가 되어서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것을 꿈꾸었죠.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지만, 음악대학에 진학할 생각은 하지 않았고. 대학에 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어머니를 따라 동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노래 부르는 게 좋아 성가대를 하기 시작했고, 교회 목사로부터 성악을 하라는 권유를 받고 마도로스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성악으로 진로를 바꾸게 되었죠.
하지만, 박인수는 바로 음대에 진학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 후 구청에 임시직으로 들어가 일하면서 야간으로 성균관 대학교 사학과에 다녔고, 그러면서 당시 대한민국의 3대 테너 중 하나였던 ‘이화 예고’의 이우근 선생에게서 무료로 성악 레슨을 받게 됩니다.
이우근
선생은 어린 제자를 받아주었고 박인수는 석 달 동안 그에게서 성악 레슨을 받게 되었는데, 레슨비는 계란 다섯 꾸러미였고 사실상 공짜 수업이었죠.
하지만, 재능이 특출했던 박인수는 몇 달 뒤에 1960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하게 됩니다.
이후 대학 시절 먹을 것이 없어 당시 박인수는 중국집, 결혼식 하객 행사를 하고 몰래 피로연장에 가서 고기를 먹으면서 영양을 보충하고 성악을 공부했죠.
그러다 그는 군을 제대한 뒤 학교를 휴학하고, 5년 동안 동생과 같이 분식집, 포장마차 등을 하며 혼자서 노래 연구를 했습니다.
이후 박인수는 대학교 4학년 때인 1967년, ‘국립 오페라단’에서 ‘마탄의 사수를 올릴 때’에 주인공 ‘막스’ 역을 맡아 학생 신분으로 데뷔하지만, 공연 당시 잘하고 싶은 욕심에 발성을 바꾼 게 화근이 되어 오페라 자체를 완전히 망쳐버리고 말았죠.
당시
서울 시내 일간지들은 일제히 그를 혹평하였고 결국 오페라 무대에 서자마자 그는 한국 오페라계에서 매장이 돼 버리고 맙니다.
이후 1968년 10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게 되죠.
그 후 그는 다시 오페라에 도전하여 1969년 ‘서울 오페라단’이 만든 ‘라보엠’의 주역을 맡아 성공리에 공연을 마치게 됩니다.
이후 미국 버 펄로 음악 대학의 한 교수가 공연 녹음 테이프를 듣고 그에게 미국으로 올 것을 제안하게 되죠.
‘버폴로 대학’은 오페라 ‘파우스트’를 준비 중이었는데. 박인수를 주인공으로 낙점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박인수는 ‘한 번 공연해 달라라는 제안이었지만, 곧장 미국으로 날아갔어요. 한 번이 두 번으로 이어지고, 또 장기적으로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안고 말이죠. 경제적인 형편이 좋지 않아 유학을 간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때였는데, 얼마나 서러웠겠습니까? 단 한 번의 기회가 또 다른 기회를 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어요”라고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적중했죠.
버펄로 음악 대학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그는 학교 측으로부터 장학금과 생활비를 보조받고 미국에 남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명문대 뉴욕 줄리아드 음대로 자리를 옮기게 되죠.
박인수는 줄리아드 음대에서 마리아 칼라스 장학생 오디션에 참가하여 실력을 인정받아 오페라 ‘라보엠’의 주역으로 뽑혀 오늘날 세계적인 테너 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릴시코프와 함께 더블 캐스팅으로 선발됩니다.
하지만, 이후 줄리아드 대학의 지휘자가 바뀌면서 그와 릴시코프 모두 주역에서 밀려나게 되죠.
박인수는 학교 측에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학교 측은 난처해 하면서도 지휘자의 의견을 존중했습니다.
이에 박인수는 줄리아드 음대를 그만두고 맨해튼 음대로 자리를 옮기게 되죠.
이후
맨해튼 음대 석사 과정 학생 대다수 오페라의 주역을 맡게 됩니다.
공부는 뒷전이고 연주하기를 즐겼던 그는 맨해튼 음대 총장의 권위로 프로페셔널 성악가가 되죠.
박인수는 “미국은 신흥 국가이다 보니 유럽에 콤플렉스가 많았고, 유럽의 문화를 돈을 주고 사 오는 일이 잦았습니다. 제가 활동했던 당시에도 미국이 다른 나라보다 오페라 가수들에게 높은 개런티를 지급했고, 최고의 성악가들이 모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독일의 성악가들은 특정 극단에 소속되어 활동하지만, 뉴욕은 철저하게 프리랜서로 활동합니다. 실력이 없는 사람은 매일 놀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성악가 중에 웨이터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이 많았어요”라고 설명했습니다.
박인수는 다행히 인기가 좋아 뉴욕뿐 아니라 미국 전역 캐나다, 남미 지방까지 공연을 다녀 공연 수입도 짭짤했고, 한 번 공연할 때 천 달러 정도를 받았죠.
그렇게 남미에서 두어 달쯤 공연을 하면 5000달러 정도를 만졌습니다.
박인수의 가족이 1980년대 초반에 연간 오만 달러 정도를 생활비로 지출했을 정도라고 하니 그의 공연 수입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죠.
그리고 이후 1983년에 귀국하여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교수로 임용되었고, 2003년 퇴임할 때까지 300회가 넘는 오페라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특히 1989년에는 클래식과 가곡을 접목한 국민가요 ‘향수’를 가수 이동원과 함께 불러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게 됩니다.
이에 박인수는 “녹음을 한 게 1989년인데 이동원 씨가 찻집에 찾아왔어요. 그래서 ‘향수’라는 정지용 시집 전집을 가지고 저는 그때 부끄럽지만, 정지용이라는 시인이 있는지도 몰랐죠. 왜냐하면, 그때 그분이 납북이 됐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분이 작곡한 유명한 노래도 이은상 씨가 시를 다시 써서 했던 거예요. 그래서 ‘향수’를 처음 읽어보고 이 시가 좋고 작곡이 좋은 게 붙으면, 자기와 노래같이 할 수 있네 해서 보니까, 이게 우리 시였죠”라고 계기를 전했습니다.
이어
“제가 미아리 황무지에서 네 살부터 살았고, 논과 밭밖에 없기 때문에 그걸 너무 잘 알죠. 그게 마음에 탁 들어와서 곡이 좋으면 하겠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김희갑 선생님은 제가 좋아하는 작곡가니까, 나왔는데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며칠 후에 바로 녹음했죠. 저는 사실 향수를 한 것은 시와 노래와 가수도 제가 좋아했으니까 그래서 한 거고, 크로스 오버라든가 대중음악과 클래식의 접목에는 관심이 없었어요”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그런데 제가 의도적으로 한 것은 우리 민요와 판소리와 서양 발성법과의 접목이었습니다. 1978년 미시간에서 독주회를 하고 있는데, 어떤 분이 들었어요. 그러더니, ‘그거 어떤 나라 노래냐’라고 물어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시인이 하고 했으니까 완전히 ‘코리안 곡이다’라고 했더니, ‘좋다. 아름답다. 그런데 다 서양 음악 아냐?” 이러더라고요. 그때 1초의 별생각이 다 들었죠. 충격과 함께 ‘옳구나. 이게 서양 음악이었구나’, ‘정서는 우리 거지만 순전히 음악은 서양 음악이구나. 그래서 우리 것을 알리려고 하면 민요와 판소리 쪽을 그대로 다 하면 안 되니까, 우리 맑은 목소리에 접목을 시키면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 시작한 겁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공연 직후 클래식계에서는 클래식 음악을 모욕했다며 박인수를 비난하기도 했고, 또 자신이 단장으로 내정되기까지 한 ‘국립 오페라단’에서 제명을 당하기도 했죠.
박인수는 “사람의 고정관념은 참 무섭죠. 클래식은 대중음악과 다르다는 고정관념이 거셌고, 제가 이에 위배되는 일을 했기 때문에 파문의 중심에 섰던 것입니다. 하지만, 저를 비난했던 사람들을 이해합니다. 너무 파격적이니까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에 앞서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거죠. 개인적으로 ‘향수’를 부르고 나서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훨씬 많습니다. 성악가로서의 대중적 인지도가 높아졌고, 사람들의 인생을 다양하게 이해하게 됐죠”라고 털어놨습니다.
이어 “음반이 나온 다음에 저를 제외한 단원 13명이 투표를 했더군요. 제명 찬성이 10표였다고 합니다. 단원에 대한 징계, 제재 권한이 문화관광부에 있어서 일이 커질 뻔했죠. 당시 이어령 문화부 장관이, 저를 지지하면서 국립 오페라단 해체론까지 불거졌는데 다행히 수습됐습니다. 나중에 몇몇이 찾아와 ‘분위기에 휩쓸려 투표했는데, 잘못된 일 같다’라면서 미안해하더군요. 이 정도로 끝난 것이 다행이죠. 다른 분야였으면 쫓겨난 정도가 아니라 목숨을 내놨어야 할 테니까요”라고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이후 4년이 지나 시작된 KBS의 ‘열린 음악회’ 파바로티를 비롯한 3대 테너가 주도했던 성악계의 크로스 오버 추세가 자리 잡힌 것을 보면 선견지명이었던 셈이 되는데요.
아무튼 당시 앨범은 발매한 지 7개월 만에 70만 장이나 팔렸고, 이후 2010년 기준 총 130만 장이나 팔리며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죠.
하지만
박인수는 이에 대한 인세는 전혀 받지 않았습니다.
박인수는 “노래를 녹음하면서 계약을 안 했는데 무슨 돈을 받습니까? 인세가 총 13억 원이라고 들었는데, 10원 한 푼 안 받았습니다. ‘향수’ 노래가 나오고 연말에 이동원 씨가 길쭉한 상자 하나를 들고 집에 찾아왔더라고요. 그때까지 인세가 7억 원 들어왔는데 그동안 본인이 진 빚을 갚고 작은 집도 한 칸 마련하느라 돈을 썼다는 겁니다. ‘잘했다’라고 말했습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이어 “이동원 씨가 이제부터 들어오는 인세는 주겠다고 했는데, 깜깜 무소식입니다. 길쭉한 상자 안에 용돈이라도 조금 넣어왔나 싶어 열어보니 연어 한 마리가 있지 뭡니까? 세상 일이라는 것이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게 있는 법입니다. 인세는 받지 못했지만, 유명해졌잖습니까? 제가 ‘향수’를 부르지 않았다면 대중에게 성악가가 이처럼 잘 알려질 수 있었겠습니까? 향수 덕분에 여기저기서 불러주는 바람에 공연 수익이 늘었습니다. 오페라 가수만으로 활동하며 올릴 수 없는 수익이죠. 잃고 얻는 것은 자로 잰 듯이 되지 않는 법입니다”라고 소신을 전했습니다.
박인수는 2003년 서울대 정년퇴임 후 백석대학교 석자 교수 음악대학원장을 맡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매년 50회에 가까운 국내외 공연을 소화했죠.
한편
박인수는 아내 안희복 교수와 1965년 결혼식을 올렸으며, 박인수가 미국에서 활동할 당시 식당 웨이트리스, 계산원, 베이비시터 등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생활을 꾸려나갔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