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운 소식을 전하게 되어 마음이 아픕니다.
이미자
패티 김과 함께 3대 디바로 불렸던 원로 가수 현미가 4일 오전 향년 85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오전 9시 37분 서울 이천동 자택에서 팬클럽 회장 72살 김 모 씨가 현미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해 소방에 신고했습니다.
현미는 오전 10시 10분쯤 서울 동작구 중앙대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병원 도착 전 이미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현미에 가까운 진인인 이자연 대가수협회 회장은 인터뷰에서 현미를 언급했는데요.
이 회장은 “오늘 오전에 가장 먼저 연락을 받았다. 목소리도 크시고 건강하셔서 100세 이상까지도 끄떡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갑작스러운 소식에 다들 당황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지병이 있는 건 아니었다. 어제 저녁에도 지인과 식사를 하셨다더라”라며 “왜 사망하셨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누군가 옆에 있었다면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았을까 싶다”라고 전했습니다.
이어 “비보를 듣고 통화를 하며 울었다, 가슴이 아프고 답답하다.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라고 믿는다”라며 안타까운 심경을 전했습니다.
현미의 두 아들은 미국에 거주 중이며 비보를 듣고 급히 귀국을 준비 중인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빈소는 두 아들이 귀국하는 대로 차려질 예정이라고 합니다.
갑작스럽게
별이 되어 많은 이들이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좋은 곳으로 가길 간절히 바라고,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오늘은 그녀를 기리는 영상으로 그녀의 생애를 알아보고, 많은 이들이 알지 못했던 그녀의 속 깊은 이야기까지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가수 현미는 재즈풍 목소리로 한국형 팝을 선도했던 아주 대단한 가수로, 1957년부터 현 시스터즈로 데뷔해 활동하기 시작하여, 1962년 ‘밤안개’로 정식 1집을 발매해 많은 인기를 얻었고, 1960년대에는 주로 이봉조의 곡을 부르며 최희준, 한명숙, 이금희, 박재란, 위키리 등과 함께 1960년대 톱 가수로 활동하여 음악계에서는 이미자, 패티 김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평가를 받는 가수였죠.
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대단한 가수였던 그녀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는지 궁금해했는데, 살아생전 12살 연하와 연애까지 한다고 해 웃음을 짓게 하였습니다.
본명은 김명선, 1937년 1월 28일 생으로 고향 출생지는 평안남도 강동군 고천면 백전리이며 학력은 덕성여자대학교 가정학과 명예학사입니다.
놀랍게도 가수 노사연과 배우 한상진이 조카이며, 현미는 8남매 중 셋째로, 1.4 후퇴 때 부모, 6남매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는데요.
1957년 무용수였던 현미는 방송을 펑크 낸 여가수 대신 무대에 오르면서 가수의 길을 걷게 됐죠.
당시에는
드물게 있었던 여대생 가수라는 메리트를 살려서 ‘현 시스터즈’라는 그룹으로 활동하였고, 그중에서 센터를 담당하였죠.
1962년 이봉조와 1집을 작업하며 미국의 대가수 냇 킹 콜의 곡을 현미 본인이 직접 작사한 가사를 입혀 ‘밤안개’를 발표하였고, 단번에 스타덤에 올랐는데요.
1965년 김기덕 감독 연출,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영화 ‘떠날 때는 말없이’의 주제곡을 불러서 연달아 히트작을 만들어냈죠.
그렇게 승승장구할 것만 같던 그녀에게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는데요.
작곡가 이봉조와 연인 관계를 유명했으나, 어느 시기 이후에 둘의 관계가 파경을 맞으면서 사실혼이었다는 사실로 밝혀졌고, 충격적이게도 현미는 이봉주와 만날 당시부터 이봉조에게 자녀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임신 후 결혼까지 약속한 이후에 본처가 찾아와 현미 보고 불륜이라고 소리쳐 알게 된 것인데요.
그녀는 한순간에 불륜녀로 낙인이 찍히고 말았죠.
하지만 충격적에도 이 사건 이후에도 이봉조는 이혼 서류를 내밀며 현미와의 동거를 원했고, 현미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아마 유부남이라도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준 스승에 대한 마음이었을까요?
하지만
이봉조는 그녀에게 또 한 번의 상처를 줍니다.
바로 그 이혼 서류는 가짜였던 것이죠.
하지만, 놀랍게도 그 모든 것을 품어준 현미는 이봉조와는 20년간 같이 살았으며 현미와 이봉조 사이에는 아들이 2명이 생깁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현미의 첫째 아들과, 본처인 노전숙의 셋째 아들이 동갑이라는 사실인데요.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현미는 고인이 된 남편 이봉조를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는데요.
현미는 인터뷰에서 이봉조 씨 덕분에 스타가 돼서 잘 살고 있어서, 그를 사랑하고 고맙다고 전했는데요.
은인이고 스승이고 애인인 이봉조 씨, 그는 천재 작곡가 영화 음악 감독으로도 명성을 떨쳤던 인물로 이봉조 씨는 미 8군 부대에서 밴드마스터로 눈이 새카맣고 잘생겨서 현미 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하는데요.
추운 겨울에 트럭에서 양말을 벗어서 신겨주었던 것이 사랑의 러브스토리 시작이었고, 당시 12시간 통행금지였던 때 이봉조 씨와 현미가 처음 갔던 여관이 아직도 있어 남산에 올라갈 때면 추억에 잠기곤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이별 이후 오래도록 현미를 그리워한 이봉조 씨였다고 하는데요.
세상과 이별할 때까지 그녀를 생각하며 틀니로 색소폰을 불었고, 그런 그를 꽃다발을 들고 이봉조 무덤을 찾았던 현미는 ‘내가 혼자 산 지 40년인데 잘 있느냐’라고 하는 영상이 올라오기도 했는데요.
‘살아있을 때 따뜻한 밥 한 끼 먹고, 같이 대화하고 웃고 즐기고 해야지. 아무 소용 없다’라고 하며 전 남편을 그리워하는 그녀의 모습이 외로워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를 잊고 잘 살았으면 좋겠지만, 그녀는 또 한 번의 상처를 받게 되죠.
생전 본 적 없던 미국 살던 친척이 와서 자신의 집을 살 사람이 있다고 하길래 팔아달라고 집문서를 맡겼는데, 그 돈을 받고 미국으로 도망가 버렸고, 셋방으로 이사를 했는데 설상가상으로 7억 상당의 보석을 도둑맞으며, 전 재산을 잃어버리고 말았는데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정말 세상 살기 싫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녀는 월세로 살고 있지만 ‘건강하니까 괜찮다’라며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죠.
그러나
이봉조의 본부인은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습니다.
본부인 사이에서 낳은 4남매는 명문대를 졸업하였고, 외모 또한 훌륭하다고 하는데요.
아들은 서울대학교 법학과 수석 졸업으로 재학 중 22세에 제 26회 사법고시에 차석으로 합격했고, 서울 고등법원 판사와 하버드대 로스쿨, 유학 뉴욕주 변호사 자격증도 취득 이후 서초동 소재 법무법인 수호의 대표 변호사로 활동 중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광고도 찍을 정도로 미남이라고 합니다.
이화여대 출신 딸들도 명문 이화여대, 숙명여대를 졸업해 의사, 교수, 대기업 임원과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하는데요.
현미 입장에서는 ‘불륜녀’로 낙인찍힌 것도 모자라 본부인은 너무나 잘 사는 모습에 정말 슬플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 힘든 상황 속에서도 자식들을 다 키우고 직장암 투병을 하고 있는 연정이라는 가수를 수양딸로 받아들여 가수까지 데뷔시켰고, 최근에는 12살 연하와 연애 중이었다고 했죠.
86세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말 능력이 좋지 않나요?
현재
그녀는 띠동갑 연하남과 8년간 연애 중으로, ‘내가 35년 동안 연예계에서 깨끗하게 살았지 않나. 난 자부한다’라며 ‘스캔들은 하나 없이 살아왔는데 나도 인간이다 보니 가끔가다 외로우면 밥도 같이 먹고 그런 것’이라며 요즘 젊은 사람들처럼 자유롭게 연애를 하기도 한 그녀였습니다.
살아온 인생이 녹록지만은 않았던 그녀인 만큼 즐겁게 사는 모습이 보기 좋았는데요.
이렇게 빨리 하늘의 별이 되어 애통한 마음뿐입니다.
그곳에서는 더욱 편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