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시절 이수미의 갑작스런 소식…” 20년 동안 그녀에게 찾아온 “눈물겨운 시련들” 그리고 인생사를 알아보세요..

‘여고 시절’ 등 다수의 히트곡을 부른 1970년대 인기 가수 이수미 씨가 폐암 투병 중 향년 69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이수미

씨는 지난해 2020년 12월 폐암 3기 판정을 받고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투병 생활을 하던 중 9월 2일 별세했습니다.

인기 절정의 순간에 터진 연이은 사건사고로 내리막길을 걸어 무려 20년간 노래를 부를 수 없었던 파란만장한 인생이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묵묵히 가수의 길을 갔고, 봉사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던 이수미 씨의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인생에 대해 전해드리겠습니다.

 

 

이수미 씨는 1952년 전라남도 영암에서 8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노래 소질을 보여 1969년 목포 KBS 노래자랑을 통해 데뷔했습니다.

당시 목포여고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녀는 언니들 옷을 빌려 입고 가발을 뒤집어쓴 채 무대에 올랐습니다.

결과는 5주 연속 우승.

이듬해 목포 MBC가 생기면서 연말 노래자랑 결산 방송을 보러 온 한 음반사 사장의 눈에 띄어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데뷔 초 트로트 가수로 시작한 그녀는 별 반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작곡가 김영광 씨를 만나 1972년 발표한 팝 계열곡의 그 유명한 ‘여고 시절’이 당대의 히트곡이 되면서 톱 스타 반열에 올랐습니다.

하루아침에 신데렐라가 된 거나 다름없었죠.

그해 연말 신인 가수상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MBC 10대 가수와 TBC 7대 가수상을 수상하는 진기록을 남기며 톱 스타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귀여운 외모에 달큰한 슬픔이 묻어있는 매혹의 허스키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특유의 음색으로 높은 인기를 누린 그녀는 젊은 남성 팬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김추자, 정미조와 함께 여가수 트로이카로 어깨를 나란히 했습니다.

이 밖에도 ‘내 곁에 있어주’ 등 많은 히트곡과 함께 1970년대를 풍미했습니다.

당시 유명한 라디오 DJ 이종환 씨를 만나 그가 작사해 준 ‘두고 온 고향’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잠시

이종환 씨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음악다방 DJ로 활동하던 이 씨는 1964년 MBC 라디오 PD로 입사한 뒤, 국내 라디오 황금기를 이끌었죠.

1970년대 ‘별이 빛나는 밤에’, 1980년대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로 절정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는 2011년 폐암 진단을 받고, 2년 뒤 2013년 향년 75세로 하늘의 별이 되었습니다.

1970년대 초, 이수미 씨의 매니저라 자처할 정도로 이종환 씨가 이수미 씨의 재능을 높이 사주었고, 그래서 더욱 승승장구하던 이수미 씨에게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사고가 터지게 됩니다.

그녀의 나이 이제 겨우 22살인 1973년 7월, 지방 공연이 끝나고 이틀의 휴가를 얻어 동료 가수들과 대천 해수욕장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저녁 무렵 혼자 해변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괴한이 나타나 순식간에 이수미 씨를 공격했어요.

 

당시

경황도 없고, 또 자신을 해칠만한 사람도 생각나지 않아 그냥 ‘내가 했노라’ 하고 거짓 자백을 했습니다.

동료 가수들이 밤샘 조사를 받는 모습을 보면서 문제가 너무 커질까 봐 두려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사고를 낸 것으로 종결된 이 사건은 사실은 모 방송국의 유명 DJ가 저지른 짓이라는 소문으로 바뀌어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문제가 커지자 가수협회에는 그녀를 제명했습니다.

생사를 넘나들 만큼 큰 상처였고, 게다가 여자로서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진 피해자였지만, 이미지만 추락하고 사건이 종결된 거죠.

각 언론 지면에는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가 실려 많은 사람을 경악해 했습니다.

‘연예 활동에 염증을 느낀 그녀가 처지를 비관’, ‘스스로 사고를 냈다’라는 끔찍한 내용이었습니다.

 

정말

끔찍한 사건이었고, 이수미 씨는 엄청난 상처를 입었습니다.

천만다행히 이수미 씨는 수술로 생명을 간신히 건질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후유증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실연이 찾아왔습니다.

1년여 뒤에 제재가 풀려 ‘내 곁에 있어주’로 재기에 성공했는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또다시 사건이 터집니다.

 

 

1975년 연예인 ‘X마초’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한 출연 정지를 받아 무려 7년 동안 활동이 금지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건의 내막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수미 씨 생일에 집에 놀러 온 동료 연예인들이 대X초를 피웠고, 다들 그러니까 막기도 어려웠는데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로 다른 사람들 때문에 이런 피해를 받게 되어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결국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며 이수미 씨는 낮에는 화장품 회사의 홍보사원으로 백화점에서 근무하고, 밤에는 밤 무대에 올라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끊임없이 재기를 꿈꾸었지만 ‘사회정화 추진위원회’의 징계로 번번이 좌절되어 절망의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이렇게 20년 넘게 이수미 씨는 은둔생활을 하며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재기하겠다는 욕심마저 다 내려놓고 작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중, 97년 현재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됩니다.

 

다행히

‘천사표 남편’이라 부를 정도로 좋은 사람을 만나 안정을 얻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고아원에서 봉사활동을 할 때 수양딸 정은이를 만났습니다.

남편과 전처 사이에 낳은 딸 정아와 함께 두 아이와 부부는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친구처럼 지냈다고 합니다.

이수미 씨는 긴 터널을 지나 20년 만인 2003년에 다시 가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51세에 신곡 ‘또 다른 세상에서’를 발표하는 등 대중가수로서 활동을 재기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며 복음상가활동도 펼쳤습니다.

가수들의 권익 보호와 권리 신장에도 관심을 갖고 대한가수협회 이사와 감사직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2020년 12월에 폐암 3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더욱 마음이 아픈 것은 이수미 씨가 투병 중이던 2021년 5월에도 신곡 ‘별이 빛나는 이 밤에’를 발표하는 등 노래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이 곡이 자신의 마지막 곡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이미 주변에 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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