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경을 바라보면 겸허하고 정갈한 한국 여인의 깨끗한 기품이 느껴집니다.
‘대장금’의 ‘한상궁’ 역은 그녀의 이미지와 궁합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캐릭터였고, ‘대장금’이 막을 내린 지 오래됐지만, ‘장금이’의 멘토 ‘한상궁’의 인기는 홍콩을 포함한 중국, 일본, 몽골, 베트남,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대만, 등지로 번져나가 아직도 나라 안팎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데요.
양미경은 리즈 시절에 한미모로 전성기를 보내기도 하였지만, 2000년대 이후로는 어머니 역할로 많이 출연하고 있고, 슬프고 애절한 연기를 할 때 특히 그 포텐이 터지는데,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온몸으로 연기하는 배우죠.
양미경의 아버지는 불편한 몸을 무릅쓰고 가장으로 모범을 보이셨는데, 6.25 전쟁에 참전한 해병대 용사로 총상으로 다리를 잃고도 전선을 지킨 국가유공자라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데요.
특별한
직업이 없던 백수였던 남동생을 사람 한번 만들어 보겠다고 매니저로 고용했지만, 누나의 출연료를 횡령하고 가족에게 행패를 부렸고, 진흙탕 법정 싸움으로 가게 되자 연예계 은퇴까지 고민하기도 하고, 드라마 촬영 중 물에 빠져 죽음의 문턱까지 가기도 했는데요.
양미경의 인생 또한 굉장히 다사다난하고 힘겨웠다고 합니다.
양미경은 1961년 7월 25일 제주도에서 태어났는데, 그녀가 연기자가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숭의여대 응용미술학과를 졸업한 후 국제그룹 비서로 입사해 1년 정도 근무한 그녀는 주위 사람의 권유로 재미 삼아 KBS의 탤런트 시험에 응시했는데 뜻밖에도 합격합니다.
데뷔작은 5월 15일 스승의 날 기념 특집극인 ‘푸른 교실’로, 극중 역할은 탄광촌에 갓 부임한 선생님이었죠.
이후 수많은 드라마에서 주로 단역을 맡다가 2003년 드라마 ‘대장금’에서 ‘한상궁’ 역으로 데뷔 20년 만에 스타덤에 오릅니다.
처음에 감독은 출연 제의를 하며 중간에 죽는 역할이라고 미안해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고 오히려 오랜만에 맞는 선한 캐릭터인 데다 자신이 좋아하는 후배인 이영애의 선생님 역할이라 기꺼이 응했다고 하는데요.
드라마 ‘대장금’에서 이영애의 요리 스승인 ‘한상궁’으로 출연한 양미경은 최고의 화제 인물로 떠오릅니다.
이병훈 ‘대장금’ 감독은 “한상궁은 장금의 스승이면서 어머니면서 동시에 친구이며 어른이었다”면서 “그 모든 역할을 동시에 소화해 낼 적임자는 양미경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라고 전했었습니다.
감성 연기는 대한민국에 양미경을 따라올 배우가 없는데, 넘치는 감성을 자제시키느라 애를 먹었다고 하는데요.
매 역할마다 어찌나 진지하게 임하던지 연기할 때는 감독인 자신조차 숨을 죽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극 중에서 ‘장금’ 이영애의 요리 스승이자 ‘최상궁’ 견미리의 맞수인 한상궁 역할을 맡은 그녀는 단아하고 포근한 이미지로 인터넷에 팬카페가 생겨나고, 급기야는 극의 설정상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그녀를 위해 ‘한상궁 살리기’ 운동까지 벌어졌죠.
그리고
팬들의 뜨거운 성원에 힘입어 당초 17, 18부쯤 죽는 걸로 예정돼 있었지만, 26부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대장금’의 인기는 진귀한 궁중음식의 비법을 소개한 게 웰빙 붐과 맞아떨어진 데다, 바람직한 스승의 리더십을 제시한 것이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주었죠.
게다가 한상궁은 도덕성을 지닌 정의파의 상징적 인물로 부각되면서 불의의 부도덕한 집단에 맞서는 것도 흥미를 유발시켰고,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 최후를 마감하면서 시청자를 울린 것도 큰 사랑을 받는 이유가 되었는데요.
드라마를 통해 양미경을 알고 있는 분들은 표정이나 이미지가 단아하고 엄숙하다거나 내성적이라는 말을 비교적 많이 하는데, 실제 성격도 미혼일 때는 소극적인 데다 말수가 적어 촬영장에서도 연기를 하는 것 외에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넘어가는 수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배 탤런트 정한용이 놀림 삼아 “틀니 빠질까 봐 얘기 안 하냐”라며 ‘틀니’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죠.
그런데 ‘대장금’으로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기쁨도 잠시였고, 양미경의 인생에도 고난과 역경이 찾아옵니다.
보통의 여배우처럼 이혼과 재혼이 아니라, 친동생과의 문제였죠.
동생을 챙겨주겠다고 매니저로 고용했는데, 9억 원에 달하는 연애 활동 수익을 횡령했고, 용서를 빌기는커녕 모든 것을 거짓으로 꾸며 누나를 고소하게 됩니다.
양미경은 동생으로부터 수년간 수익금 대부분을 전달받지 못했으며, 수익 배분 계약 조건은 8 대 2라고 주장했지만, 동생은 수익 배분 비율은 5 대 5 이고, 전속 계약서가 존재하고, 초상권 관련 사업 손해 등에 대한 근거 등 증거 자료를 모두 준비해 놓았다고 주장했죠.
친동생의 주장은 확실히 무리가 있었는데, 양미경이 갓 데뷔한 신인도 아닌데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중견 탤런트가 5 대 5 배분을 하는 것은 연예계 생리에 맞지 않았습니다.
남동생은 “누나가 존속 폭x과 횡령권 등으로 나를 고소해 이미 두 차례 검찰 조사를 받았으며, 이에 횡령, 손해배상 등을 이유로 검찰에 맞고소 할 것”이라고 주장했죠.
사실 양미경은 계약서 내용도 알지 못했으며, 횡령과 계약 불이행권도 남동생이 속여서 계약한 부분을 누나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라고 하는데요.
결국
서울 남부지법에서 열린 재판에서 판사는 남동생이 누나의 매니저로 활동하면서 ‘광고 출연료의 50%를 가져간다’라는 등의 허위 계약서를 작성해 모두 4억 7000여만 원의 출연료를 가로챘다며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합니다.
서울 남부지법 이인석 판사는 판결문에서 “누나의 출연료를 횡령하고 가족에게 행패를 부렸음에도 오히려 누나를 무고하는 등 죄질이 좋지 않다”라며 판시했죠.
이 당시 양미경은 연예계 은퇴 기로에 있었지만, 남편이 옆에서 큰 힘이 되면서 잘 극복했고, 지금처럼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양미경이 남편을 만나게 된 계기는 1987년 운명적인 사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KBS 가요 드라마 ‘바람 바람 바람’을 찍는데 한강에 빠졌던 것이죠.
자전거
타는 장면을 촬영 중 페달을 잘못 밟는 바람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다 한강에 빠지고 말았는데, 시집도 가지 못하고 이대로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양미경을 구해 준 사람이 당시 드라마 조연출이었던 허성룡 씨인데요.
원래 살집이 많고 뚱뚱해서 안 좋아했는데, 그 이후로 사람이 너무 멋져 보였다고 합니다.
확실히 지금 사진에서도 좀 뚱뚱한데 당시 양미경의 말처럼 살집이 있고 미남은 아니었죠.
게다가 양미경은 동료 미남 탤런트들을 많이 봤으니 더욱더 비교가 되었을 겁니다.
이 한강 사건으로 둘은 좋은 기억을 가진 채 헤어지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인연이 아니었죠.
그러다가 둘은 6개월 후에 다시 우연히 방송국 로비에서 촬영 대기를 하다가 만나게 되었고, 기다리면서 드라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허성룡 씨는 “아, 이 배우가 작품을 보는 나름의 시각과 눈이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 괜찮은 사람이라는 마음이 생겼죠.
허성룡은 양미경의 외모가 아니라 대화를 오래 나눠보고 서로 통하는 것이 있으니까 사귀기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양미경 역시 이때 허성룡의 성격을 파악했고, 또 그전에 단역이었던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서슴없이 몸을 날렸던 일로 그 마음가짐에 반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렇게
둘은 서로 이야기를 하다가 마음이 끌렸고, 6개월 연애 후인 1988년 5월 2일 결혼식을 올리게 되죠.
양미경은 남편을 성격을 보고 선택을 했고, 그것이 나중에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고 고백했는데요.
야외 촬영하다 쉬는 시간에 잠시 집에 들르면 남편이 ‘왜 거기서 쉬지 않고 집에 왔느냐’라고 그러면서 양미경이 식사 준비를 하면, 남편이 빨래하고 아들은 방을 닦는다고 합니다.
사소한 부분이지만, 이런 것들을 일하는 아내와 엄마의 몫으로 밀어놓으면 더없이 힘들어지는데 자진해서 도와준다고 하는데요.
그녀의 연기생활은 올해로써 29년째인데, 지난 84년 주위의 권유로 KBS 공채 탤런트 모집에 응시 합격한 뒤, 그해 주말 드라마 ‘미망인’에서 대사도 없이 그냥 지나가는 엑스트라로 출연한 것이 연기자로서 첫 데뷔 무대였습니다.
이후
TV 드라마뿐만 아니라 영화에도 출연, 배우로 또 활동 영역을 넓히는 등 연기자로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는데, 그녀만의 독특한 캐릭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죠.
텔런트 양미경을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많은데, 흔히 말하는 ‘단아한’만 갖춘 게 아니라, 외모에서 풍기는 느낌부터가 남다른데, 어질고 온화하면서도 자녀에게는 엄한 우리네의 전통적 어머니상은 물론 순종의 미덕을 갖춘 효녀와 연료의 고전적 여인상을 동시에 느낄 수 있습니다.
조각품 같은 인위적인 미가 아닌 모나지 않은 호감형의 외모를 지녔다는 것도 그녀의 강점인데요.
현대극과 사극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농익은 중년의 성숙한 연기를 보여주는 것도 이 때문에 가능하죠.
그리고 한눈팔지 않고 연기에 전념할 수 있는 타고난 성품과 주변의 환경도 무시할 수 없는데요.
그녀가 인기 스타이기 이전에 그림과 시와 수필을 좋아하는 등 예술에 관심이 많고, 학창 시절부터 수화를 배우고 복지시설을 드나드는 등 사회 봉사 활동에 관심이 많다는 것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죠.
82년 숭의여대 응용미술과를 졸업하고, 훗날 꽃동네 현도사회복지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그녀의 어릴 때 꿈은 섬마을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파도와 갈매기를 벗 삼아 고요한 섬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동심의 세계에서 살고 싶었다는 것이었고, 그만큼 말수가 적은 감상적인 성격이다 보니 자연, 시와 그림을 좋아하게 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육자로서 그녀의 꿈은 장소만 바뀌었을 뿐이지, 드라마와 대학 강단을 통해 현실화가 됐으니 빗나간 것은 아닌 셈인데요.
그동안 그녀는 두 권의 책을 냈는데, 자신이 애송하는 저명 시인의 시 60편을 골라 감상문을 곁들여 엮은 시집 ‘양미경의 가슴으로 읽는 시’와 수필집 ‘당신이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이 그것인데, 그녀의 인생관이 간단치 않다는 것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죠.
그런데
그녀에게는 또 한 번 청천벽력 같은 일이 발생하게 되는데, 바로 어릴 적부터 평생 그녀를 이끌어준 그녀의 아버지가 80세를 일기로 그만 세상을 떠나게 되신 것인데요.
배우 양미경의 아버지는 고 양상옥 씨인데 6.25 전쟁 상이용사입니다.
그는 18세에 해병대 용사로 한국 전쟁에 참전해 부상에도 불구하고, 전선을 지키는 용맹함으로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고, 지난 2010년 지병으로 별세해 국립현충원에 안치됐죠.
양미경은 아버지의 뜻을 되새기기 위해 국가보훈처 나라사랑 홍보대사로도 활동하고 있는데요.
양미경은 ‘한상궁’으로 인기가 치솟고 인터넷에 팬카페가 생겼을 때 남편이 팬들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빡빡한 촬영 일정 탓에 ‘힘들다’라고 투정 부리면 “배우가 감수하고 이해해야 하는 부분을 잊지 말라”라고 전직 연출자답게 따끔한 충고를 잊지 않은 것인데요.
우연히
책을 읽다 접한 ‘현재는 선물이다’라는 말을 좋아한다는 양미경.
그 말을 되새기면서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를 불안해하지 않는 방법은 현재 삶에 충실하고 만족하면서 사는 것임을 깨달았다는 그녀의 말은 듣는 이의 마음까지 훈훈하게 만들었습니다.
양미경 씨가 앞으로도 지금처럼 좋은 연기를 보여주길 바라며 오랫동안 사랑받는 배우로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길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