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해서 잘 사는가 싶더니 결국..” 하하 부부에게 찾아온 안타까운 소식.. 이름도 듣지 못한 병세가 찾아오고서 결국..

하하는 독일에서 4.9kg의 우량아로 태어났습니다. 아 참, 제목의 원제 내용이 궁금하시다면 글 하단 부분을 먼저 확인해보실 수 있습니다.

당시

이 사건은 독일 신문에 실릴 정도로 큰 이슈였고, 하하의 어머니는 우량아로 태어난 그를 보고 이렇게 생각했죠.

‘아, 아이는 커서 거인이 되겠구나’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하가 3살일 때 모든 가족들은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그는 이후에도 남다른 삶을 이어나가는데, 이 삶의 중심에는 그의 어머니가 계셨죠.

독일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던 어머니 덕분에 그는 어려서부터 클래식으로 조기 교육을 받아 누나와 함께 바이올린과 첼로를 연주하곤 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그의 어머니는 남매에게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해주고 남매의 재능을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셨죠.

 

그리고

어머니 덕분에 실제로 하하는 초등학교 때 성적이 매우 좋았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이미 수학의 정석으로 중학교 과정을 예습했고, 시험을 보면 하나만 틀려도 울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죠.

그러나 시간이 지나 중학생이 된 그는 공부에 대한 흥미를 잃기 시작합니다.

그와 달리 그의 누나는 전교 회장에 전교 1등, 게다가 피아노까지 잘 쳤기에 그는 스스로 더욱 위축됐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하의 어머니는 “네 길이 따로 있나 보다”라고 할 정도로 그를 항상 응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관심은 어린 그에게 있어서 사랑이 아닌 부담감으로 다가왔죠.

계속해서 자신을 도와주려는 어머니.

 

그리고

자신을 그냥 내버려 두기를 원하는 하하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갈등이 생겼고, 그렇게 고등학생이 된 그는 학교도 제대로 나가지 않을 정도로 삐뚤어지기 시작합니다.

고등학생이 된 하하는 스스로의 용돈을 벌기 위해 이태원에서 짝퉁 물건을 팔며 돈을 벌기도 했죠.

 

 

90년대 당시 이태원은 짝퉁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넘쳐났으며, 이와 동시에 힙합을 사랑하는 이들이 모이던 힙합의 중심지였습니다.

이태원에서 자연스럽게 경험한 힙합은 그의 마음을 움직였고, 이때부터 하하는 힙합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됩니다.

처음으로 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는 아들을 위해 그의 어머니는 곧바로 전화번호부를 뒤져 여러 기획사에 전화를 하고, 마침내 한 기획사와 연결이 됐죠.

이후 그 기획사는 하하와 음반을 제작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였으나, 앨범 제작을 위한 돈을 요구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결국 돈을 구해왔지만, 안타깝게도 이 일은 사기로 끝났고 결국 두 모자는 그 돈을 날리게 됐죠.

 

그리고

어린 마음에 큰 상처를 받은 하하를 본 어머니는 이때 정말 엄청난 결정을 하게 됩니다.

바로, 직접 기획사를 차린 것이었죠.

어머니는 자신의 이름이었던 “옥정”의 이니셜을 따 ‘OJ 기획사’를 설립하고, 음악 프로 엠넷에 전화를 걸어 촬영 장비를 빌렸으며 심지어 뮤직비디오까지 직접 촬영하고 감독까지 하셨습니다.

이태원 길거리에서 만난 외국인들에게 10000원씩 주고 뮤비에 참여시켰으며, 이후에는 버클리 음대에 진학하는 누나까지 작사와 작곡을 도왔죠.

동네 사진관에서 찍은 다소 촌스러운 사진과 누나가 정성스레 써준 글귀가 적힌 이 앨범 사진을 보면 하하를 향한 가족들의 깊은 사랑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후 어머니는 여러 방송국에 방문해 하하를 홍보했고, 덕분에 그의 뮤직비디오는 엠넷에서 하루에 12번씩 나오기도 했죠.

그러나 당연히도 그의 앨범은 많은 관심을 받지 못했고, 그렇게 그는 잠시 동안 가수의 꿈을 접게 됩니다.

훗날, 그의 어머님은 ‘하하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기도 하셨죠.

 

 

“나의 아들. 하하는 나의 생명. 살아가는 이유. 내 생명보다 귀한 아들”

 

이렇게

이태원에서 짝퉁도 팔고 앨범도 발매하는 등 특이한 학창 시절을 보낸 하하도 시간이 지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됩니다.

당시 그의 어머니는 그가 대학만큼은 가기를 간절히 원하셨고, 그렇게 그는 대학 입시를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음악도, 미술도, 공부도 못하는 그가 어떻게 대학에 갈 수 있을까요?

오랜 시간을 고민한 하하는 결국 답을 찾게 됩니다.

그가 어릴 때부터 좋아하고 잘했던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사람들을 웃기는 것이었죠.

그렇게 그는 대입을 앞둔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연기 학원에서 연기를 배워 이후 연극 영화과에 입학하게 됩니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한 이후에도 그는 힙합을 계속하고 싶었죠.

그렇게 하하는 2명의 멤버들을 모아 ‘지키리’라는 힙합 그룹을 만들고, 2년이라는 시간을 준비해 겨우 1집을 만들었지만 이 앨범은 정말 처참하게 망합니다.

‘지키리’의 앨범은 당시 사회적 문제였던 청소년 범죄, 성범죄 등 90년대에 일어났던 충격적인 사건, 사고 등을 적나라하게 비판하는 가사들로 인해 앨범이 19세 미만 청취 불가 판정을 받아 아예 발매조차 못하게 된 것이었죠.

이후 하하는 ‘지키리’를 홍보하기 위해 여러 케이블 방송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한 음악방송 피디 덕분에 그는 ‘지키리’로 데뷔했던 같은 해, ‘what`s up yo!’라는 음악 프로그램의 MC로 활동하게 되죠.

당시 이 프로그램에서 활약하던 그는 바로 다음 해 MBC 시트콤 ‘논스톱 3’에 출연하는 기회까지 얻게 됩니다.

조인성, 장나라와 같은 초대형 스타를 배출했던 인기 시트콤 ‘논스톱 시리즈’에 참여한 하하는 산만하고 시끄러운 대학생 역할을 연기하며 대중적인 인지도를 처음으로 얻게 되죠.

당시 그는 2개의 라디오를 진행하며 많은 관심을 받았고, 연이어 KBS의 인기 소개팅 프로그램 ‘장미의 전쟁’까지 출연하며 더 큰 사랑을 받았고요.

 

그러나

데뷔한 지 2년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내에 큰 성공은 되려 그에게 독이 되었습니다.

본인의 인기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금방 자만하게 된 것이었죠.

그러다, 어느 순간 함께 촬영을 했던 동료들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앞서 나가는데 혼자만 제자리에 있는 모습을 보고 그는 조금씩 위축되더니, 결국 방송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당시 하하는 본인이 너무 불쌍하고 초라했으며, 결국은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반항심과 패배주의로 삭발까지 하고, 1년 6개월 동안 동안 폐인처럼 살게 되죠.

종종 방송 섭외 문의도 왔지만 너무나 오래된 방황 때문에 두려워서 방송에도 잘나가지 않았고요.

그리고 그렇게 방황하던 하하는 어머니를 이어 그의 인생을 바꿔준 두 번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친구들과 함께 술을 먹고 집에 가는 길에 우연히 유재석을 만나게 된 것이었죠.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하하는 유재석을 직접 만난 적이 없었고, 당시 유재석은 수많은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인기 연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유재석은 방송을 통해 하하를 몇 번 봤는지 그의 이름을 친근하게 불러주었죠.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인기 MC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었다는 것.

그리고 몇 마디의 응원에 큰 감동을 받은 하하는 다시 방송을 시작해 “반드시 언젠가 저 사람과 같은 무대에 서고 말겠다”라는 결심을 하게 되죠.

그렇게 그는 길고 긴 18개월의 슬럼프를 유재석을 통해 극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방송을 다시 시작한 하하는 이후 ‘엑스맨’에 출연해 유재석과 함께 촬영을 하게 되며, 마침내 그 꿈을 이루게 되죠.

또한 같은 해 12월에는 한국 예능의 전설, ‘무한도전’에까지 합류합니다.

젊은 시절 술을 워낙 좋아했던 하하는 과음으로 인해 ‘무한도전’의 녹화에 지각을 하는 일이 잦기도 해서 문제를 많이 일으켰죠.

심지어 크리스마스 촬영 당일에는 전날 술을 너무 많이 먹어 촬영에 1시간을 지각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유재석은 날을 제대로 잡아 그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한 적이 있을 정도였고요.

 

그렇게

계속해서 이어졌던 유재석의 도움으로 그는 이후 녹화 전날 과음하는 습관까지 조금씩 고치게 됐죠.

이처럼 유재석은 젊은 시절 방황하고 놀기 좋아하던 하하가 제대로 된 인생의 방향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줬습니다.

그렇게 하하가 아직까지도 유재석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거겠죠.

‘무한도전’에서 받은 사랑으로 2006년 MBC 연애 우수상을 받고, 2007년에는 멤버들과 함께 연애 대상까지 받게 됩니다.

 

그리고

예능인으로 큰 사랑을 받던 그는 ‘너는 내 운명’이라는 곡으로 다시 한번 가수에 도전하죠.

주변에서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이 노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2008년 KBS 뮤직뱅크에서 무려 1위를 하게 됩니다.

가수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였기에 그때만큼은 그에게 있어 더욱 특별한 순간이었죠.

그렇게 말했던 가수로서의 1위를 선물 받은 그는 이후 천식으로 공익 군입대를 하게 됩니다.

2년 후 하하는 군 복무를 마치고 연예계로 돌아옵니다.

원래부터 ‘무한도전’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그였기에 대중들과 방송 관계자들은 그의 복귀에 많은 기대를 했죠.

그러나 군대에서의 2년이라는 시간은 오랜 시간이었고, 너무나 많이 바뀌어 버린 방송 스타일 때문에 이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하하는 또다시 슬럼프에 빠지게 됩니다.

특히, 이 슬럼프는 당시 그가 출연하던 ‘무한도전’에서 극에 달했죠.

당시 ‘무한도전’은 한국 내 가장 인기가 높았던 프로그램이었고, 그렇기에 대중들은 방송에 적응하지 못하는 그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당시 그는 “내가 방송계에 더 이상 필요한 존재가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하며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죠.

“그때 내가 돌아와 보니 사람들이 내가 변했다고 하는데, 아니에요. 무도가 변했던 거예요. 시스템이 완전 변한 거예요. 못 따라가겠어 그 템포를. 근데 내가 공익 간 사이에 1년, 2년 정도 안에 너무 수많은 일이 많이 생겼어요”

 

그리고

이때 모든 자신감을 잃은 그를 보고 유재석은 이런 말을 했죠.

“하하야 주눅 들지 마. 너 그랬던 놈 아니잖아. 그냥 박어. 나 유재석이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형이잖아. 그냥 던져. 형이 아무거나 다 받을게. 근데 대신 가만히 있지는 마. 뭐라도 해. 던져. 동훈아 극복해야 돼. 그냥 멍 때리고 서 있지만 마”

이 말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그는 이를 기점으로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기로 결심합니다.

자존심이 상하면 상한다고 말하고, 안 웃기면 안 웃겨서 미안하다고 하며 못하면 못하겠다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었죠.

 

그렇게

유재석의 조언 이후, 하하는 그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모두 표현하며 기존의 예능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철없는 캐릭터로 다시 큰 사랑을 받으며 슬럼프까지 극복하게 됩니다.

이후 하하는 또 다른 자신의 인생 프로그램 ‘런닝맨’에 출연합니다.

‘무한도전’에서 이전의 자신감을 모두 되찾은 그는 모든 기량을 ‘런닝맨’에서 폭발시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죠.

그는 뛰어난 예능감으로 상황에 따라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였고, 특히나 ‘런닝맨’ 초기에 얻은 ‘하로로’라는 별명으로 활약하며 이후에는 한국을 넘어선 한류 스타가 됩니다.

그리고 ‘런닝맨’에 합류한 이후 그는 친구들과 함께 ‘401 정육 식당’을 개업합니다.

이 동업은 그의 가장 친한 친구 2명의 사고가 그 계기였죠.

그의 친한 친구가 하하의 생일날 그를 만나기 위해 가는 중 불법 유턴하는 차량에 의해 사고를 당해 고관절이 모두 으스러지는 사고를 당합니다.

이 친구는 당시 영화 액션배우를 오랫동안 준비하던 친구였고, 한창 주목을 받던 신인이었는데, 그 사고로 모든 것을 잃고 18개월 동안 누워 있었죠.

비슷한 시기 또 다른 친구는 골프 선수였는데, 그 또한 사고로 인해 어깨뼈와 팔꿈치가 으스러져 그마저도 한순간에 꿈을 잃었죠.

그때 이 셋은 2년간 한 집에 살며 앞으로는 어떻게 살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했고, 결국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도 하지 말라는 친구와의 동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실제로 김종국, 유재석, 강호동을 포함한 모든 주변 지인들이 절대 친구와는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며 이 결정을 강하게 말렸죠.

 

그러나

“우리들만큼은 다를 것이다”라는 자신감과 함께 오픈한 식당은 결국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김종국이 ‘친구랑 동업을 한다면 하하처럼 해야 된다’라는 말을 남기기까지 했고요.

그러던, 하하는 2012년 갑자기 가수 별과의 결혼을 발표합니다.

이 둘은 사귄 지 7개월 만에 혼인신고를 해 ‘속도위반으로 하는 결혼이 아니냐’라는 추측성 기사가 나오기도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죠.

그의 부인인 별은 20살에 가수로 데뷔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딸의 데뷔를 앞두고 발생한 의료 사고 때문에 무려 11년을 식물인간 상태로 병상에 누워 계셨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20살부터 한 집안의 가장 역할과 병간호를 해오고 있었죠.

아버지의 병간호와 의료소송 등으로 누구보다 힘든 상황이었지만, 일도 열심히 하며 항상 밝은 모습인 그녀를 보고 하하는 “만약 내가 결혼을 하면 이런 여자랑 해야겠다”라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 그녀의 아버지 건강이 갑작스레 악화되기 시작했고, 그렇게 하하는 급하게 혼인신고부터 했죠.

연애를 한지 7개월 만에 혼인신고를 한 것은 병상에 계시는 아버지와 아내를 위한 하하의 속 깊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2012년 10월 14일, 미니 결혼식을 올렸고 아버지는 딸의 결혼식 사진을 본 바로 다음 날인 15일에 돌아가셨죠.

정식 결혼식을 올리기 전이었지만, 장례식 때도 법적으로는 하하가 남편이었기에 그는 상주 자격으로 3일 내내 같이 자리를 해줬고요.

별은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결혼식에 오지 못하셨지만, 아빠 대신 평생 딸을 지켜줄 남자가 있는 것을 알고 눈을 감으셨어요. 그것 때문에 제 남편에게는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잘 살고 있어요”

방송에서는 마냥 철없이 보이지만, 이처럼 그는 현재 본인의 인생에 대해서는 매우 진지한 모습을 보입니다.

 

앞서

말한 고깃집을 포함해 현재 그는 여러 예능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개인 유튜브 채널, 직접 대표로 인한 소속사, ‘꽌리티’라는 패션 브랜드까지 운영하는 그는 현재 그 누구보다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결혼 이후 하하는 사랑스러운 아들 둘, 그리고 2019년에는 딸을 얻어 다둥이 아빠가 됐죠.

애를 하나 키우는 것도 힘든데 이미 아이가 셋이나 있는 부인이 “넷째는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다”라고 말하는 걸 보면, 그렇게 바쁘게 활동하면서도 그가 집에서 얼마나 좋은 남편 그리고 동시에 좋은 아빠로서도 역할을 잘 해내는지 알 수 있습니다.

무조건 혼자 잘 되는 것이 아닌 항상 주변 사람들과 함께 잘 되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노력하는 하하, 그를 응원합니다.

 

그리고

가수이자 방송인인 하하, 별 부부가 딸의 투병 사실을 알렸다.

별은 한동안 인스타그램도 유튜브 ‘별빛튜브’도 정규 앨범의 녹음도 할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자신의 셋째 딸 송이가 아팠기 때문이라고 전했는데요. “너무나 건강하던 아이에게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아픈 아이는 물론이고 가족들은 물론 저역시 너무나도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밝혔다.

“하필이면 우리집에서 가장 작고 어리고 약한 송이가 ‘길랑바레’라는 처음 들어보는 낯선 병을 얻게 되었는지 차라리 우리 송이 대신 제가 아프게 해달라”며 “매일 밤마다 기도를 올리고 있는데, 가슴이 무너지고 또 무너져 내렸다”고 전했다.

별은 과연 이 병이 언제 나을지 낫기는 하는 건지 얼만큼 좋아질 수 있을지 확신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서 주변에 알리지도 알리고 싶지도 않았는데 얼마전 교수님께서 “약물치료도 외래진료도 재활도 이제 필요 없을 것 같다”는 말씀을 듣고 “이제서야 속시원히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밝혔다.

“지난 한 달이 폭풍처럼 빠르게 지나가 송이가 아팠던게 꿈인지 생시인지 몰랐다”고 말하며, 살아있음에, 건강히 숨 쉴 수 있음에, 기도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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