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연 씨는 보기만 해도 즐겁고 뭔가 우리를 유쾌하게 해 줄 것만 같습니다.
또한
그녀는 사연이 없어서 노사연이라고 말해왔지만, 진짜 그녀의 인생은 행복하기만 했을까요?
겉보기와 완전히 다른 그녀는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또한, 이번에 가까운 이모인 가수 현미 씨의 갑작스러운 별세가 더욱 충격적인 이유는 바로 현미 씨의 친언니이자 노사연 씨의 어머니의 죽음이 너무나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사연 씨는 1957년 경상남도 마산에서 출생했는데요.
3살 때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화천군으로 이사했습니다.
그래서 실질적인 고향은 화천이라고 해요.
노사연
씨는 단국대학교 성악과에 재학 중이던 1978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돌고 돌아가는 길’로 금상을 수상하면서 데뷔했는데요.
가수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고, 그저 대학 생활에 추억을 쌓으려고 나왔다고 해요.
추억을 쌓으려고 나온 것치고는 어린 시절부터 노래 실력이 탁월했던 노사연 씨.
노사연 씨의 노래를 듣고 감동해서 주위 사람들이 다 울었다고도 하고요.
고등학생 때 통기타를 뜯으며 패티 김 씨의 ‘이별’을 불렀는데, 이 노래를 들은 노사연 씨의 이모 현미 씨도 눈물을 흘렸다고 해요.
당시 대학 가요제에는 심수봉, 임백천, 배철수 씨 등 어마어마한 동기들이 출전했는데요.
노사연 씨는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주목받으며 이들 모두를 제치고 2위에 해당하는 금상을 수상했으나, 티비에서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2017년 방송된 MBC 휴먼 다큐 ‘사람이 좋다’에 출연한 노사연 씨는 “대학 가요제에서 신데렐라가 됐다가 그다음부터 굉장히 많은 상처를 받았다”라며 “예쁜 애들, 날씬한 애들이 우선이었다. 노래를 잘 못해도 예뻐야 했다. 그래서 방송도 접고 한 5년 동안 언더그라운드로 가서 방송을 안 했다”라고 털어놨습니다.
오래
꿈꿔왔던 가수의 꿈을 포기할 만큼 외모에 대한 스트레스가 컸다는 노사연 씨.
그녀는 2008년 방송된 MBC ‘무릎팍 도사’ 출연 당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자는 살찌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약국에서 살 빼는 약을 사서 먹었는데, 빨리 빼기 위한 욕심에 약을 과다 복용했다. 그때부터 기분이 이상해지고, 먹기가 싫어지고 기운이 빠지기 시작했다. 결국 약물 과다 복용 부작용으로 우울증을 겪고 말았다. 집에 인형이 되게 많았는데 그 인형들이 모두 나에게 손가락질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 모습을 지켜본 그녀의 어머니는 노사연 씨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게 되었다고 해요.
이런 정신적인 상처를 극복하는 데 무려 5년이나 걸립니다.
1983년 노사연 씨는 드디어 정식 데뷔곡 ‘님 그림자’를 발표하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1990년대에는 한참 예능 프로에 나와서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는데요.
특히 주병진 씨가 ‘일요일 일요일 밤에’를 진행하는 당시 ‘배워봅시다’라는 코너에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며 맹활약했죠.
그리고 이 당시 노사연 하면 떠오르는 그 노래 ‘만남’이 탄생합니다.
1991년 ‘만남’으로 최고 인기 가수상과 최고 인기 가요상을 동시 석권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운명 같은 사랑을 만나 결혼합니다.
바로 이무송 씨인데요.
그는 의사가 되기 위해 미국 워싱턴 엔드제퍼슨 대학교 유학 중 1983년 MBC 대학 가요제 동상 수상을 계기로 가수로 데뷔했고, 1992년 ‘사는 게 뭔지’로 가요 톱텐에서 5주 연속 1위를 하며 골든컵을 수상하는 등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죠.
두 사람은 1983년 대학가요제 무대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고, 노사연 씨는 당시 드럼을 치는 이무송 씨의 모습에 첫눈에 반했다고 합니다.
이후 수영장에서 이무송 씨를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요.
노사연 씨는 이때부터 이무송 씨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수영 선수로도 활약했던 그의 몸이 너무 좋았다고 해요.
하지만, 이무송 씨는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았는데요.
노사연 씨의 너무 적극적인 구애가 부담스러워 나이를 10년이나 더 어리게 속이고 미국에 아이가 있다고 거짓말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두 사람 나이 차이는 4살로 이무송 씨가 4살 더 어리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사연 씨는 포기하지 않고 그에게 구애를 했고, 두 사람은 라디오 방송 ‘노사연, 이무송의 특급 작전’을 같이 진행하며 가까워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결국, 두 사람은 1994년 결혼을 했고 1995년 아들 이동헌 군을 낳았어요.
당시는 여자 연상, 남자 연하 커플이 거의 없던 때라 두 사람의 결혼은 더욱 화제가 되었고, 얼마 못 살 거라고 예상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혼하지 않고 잘 살고 있죠.
그런데 두 사람은 대표적인 잉꼬부부로 알려져 있었는데, ‘동상이몽’에 나와 솔직한 모습을 털어놓은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막상 결혼해 보니 미국에 살았지만 생각이 보수적이었던 이무송 씨와 한국에 살았지만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노사연 씨는 맞지 않았어요.
심지어 언니 집에도 못 가게 할 정도였다고, 이무송 씨는 자기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지키고 싶어 했는데 노사연 씨는 너무 자유분방했다고 합니다.
노사연 씨는 결혼 일주일 만에 이혼이라는 단어를 꺼내놓기에 이르렀어요.
그리고 결혼 10년 동안 두 사람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싸웠다고 합니다.
또한 노사연 씨는 ‘이혼’이라는 소리를 밥 먹듯이 했는데, 본인 말로는 무려 이만 번 넘게 ‘이혼’이라는 소리를 했다고 해요.
반면, 이무송 씨는 그런 소리를 절대 입 밖에 꺼내지 않았습니다.
이것만 봐도 두 사람 성격이 어떤지 짐작이 되시죠?
사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결혼에 대한 기대가 달랐습니다.
이무송 씨는 노사연 씨에게 누나 같은 때로는 엄마 같은 그런 포근한 사랑을 원했는데, 노사연 씨는 겉은 대장부처럼 보이지만 이무송 씨가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으로 오로지 그만 바라보았고, 그에게 기대고 싶고 의지하고 싶었다고 해요.
노사연 씨의 속은 소녀 그 자체였고, 평생 남편에게 여자로 보이고 싶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노사연 씨는 원래 외모 콤플렉스도 있었던 데다 여자로서 4살 연상이고 남편을 너무 좋아하다 보니 이무송 씨가 어리고 예쁜 후배들과 접촉하는 것도 극도로 신경을 곤두세웠어요.
노사연 씨의 속마음은 이러했지만 함께 방송하는 일이 많았고, 그녀가 방송 선배다 보니 더 나은 방송을 위해 그에게 이것저것 조언을 하다 보니 그게 그에게 상처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수입이 노사연 씨가 더 많다는 것도 그에게 은근히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결혼 생활 내내 서로 불행했다는 것을 털어놓기에 이르렀어요.
그리고 참고 참던 이무송 씨 입에서 졸혼이라 말도 나오고 별거를 희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서로 힘들게 하는 점은 있었지만, 깊은 마음속에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2006년 경, 노사연 씨의 청력에 이상이 와 한쪽 귀가 거의 안 들리게 되었습니다.
워낙 세상이 좋아지다 보니 이제 보청기를 끼고 생활하는 데 크게 지장 없이 지내고 있는데요.
그러나 가수로서 한쪽 귀가 안 들리게 되자 그 절망감이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노사연 씨는 원조 ‘멀티테이너’로 가수를 시작했지만, 예능 라디오 방송 등을 휩쓴 사람인데요.
가수로 무대에서 노래 부를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그녀가 청력을 잃는다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었죠.
그런데 나중에 보청기를 끼고 보니 이무송 씨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고 합니다.
그동안 귀가 잘 안 들리는 자기를 위해 크게 말하다 보니 그의 목소리가 그렇게 커져버렸다고, 그런 것을 전혀 티 내지 않고 해 왔던 것이죠.
이렇게 한쪽 귀가 거의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나온 노래가 바로 ‘바램’이었어요.
이 노래는 방송 등 홍보가 거의 없었는데도 중장년층 사이에 입소문을 타면서 인기를 끌었어요.
노사연 씨의 중저음과 애잔한 멜로디가 잘 어우러져 그녀의 대표곡 ‘만남’을 이을 또 하나의 명곡이 되었습니다.
그 후 2022년 ‘미스터 트롯’에서 임영웅 씨가 이 노래를 불러 더욱 큰 사랑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크고 작은 힘든 일들을 잘 헤치고 나아갔지만, 절대 회복할 수 없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2012년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요.
이 사연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갑자기 노사연 씨에게 안부 전화를 했는데 목소리가 좀 안 좋게 느껴졌습니다.
그때 바쁜 일로 제대로 전화를 못 받은 노사연 씨.
그런데 평상시와 느낌이 너무 다르게 어머니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들더래요.
계속 마음에 걸려 그날 저녁에 전화했더니 오빠가 받아 어머니가 주무신다고 해서 통화를 못 했습니다.
그 당시 어머니가 오빠네 집에 가 있었죠.
그 다음날 아침 오빠한테서 울면서 전화가 왔는데 아침에 가서 보니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심폐소생술로 다시 살려내긴 했지만, 무려 3년을 의식불명 상태로 계시다 하늘나라로 떠나셨습니다.
“10시에 전화가 왔어. 우리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우리 오빠가 울면서. 우리 엄마가 건강했는데.. 그게 말이 돼요? 말이 안 되지 않아요? 심폐 소생을 하셔가지고 기적적으로 소생을 하셔서 의식이 없는 상태로 3년을 사셨어요”
슬픔이 가히 어떠했을지 짐작이 되시죠.
특히 노사연 씨의 어머니 김화선 씨는 현미 씨의 친언니인데요.
한때 북한에서 그 유명한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다녔던 제자로 현미 씨 못지않은 끼로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기도 한 분이셨습니다.
현미
씨도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에너지 넘치는 모습에 백수를 예상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쓰러져 돌아가신 것처럼 노사연 씨의 어머니도 갑자기 그렇게 쓰러져 돌아가신 것이죠.
부모님들은 예고 없이 자식들 곁을 떠나실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효녀로 소문이 자자했던 노사연, 노사봉 자매였지만 그래도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노사연 씨는 ‘돈만 드렸지 딸로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많은 추억을 쌓지 못해 죄송하다’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현미 씨가 돌아가실 때 얼굴이 아기처럼 참으로 평온해 보였다고 마지막 목격자인 팬클럽 회장이 얘기했는데요.
노사연
씨도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얼굴이 살구꽃처럼 어여쁘게 변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하죠.
정말 너무나 믿기 어려운 얘기인 거 같은데요.
그래도 두 분이 모두 좋은 곳으로 가셨다고 하니까 그 점은 안심이 되네요.
분명 하늘나라에서도 두 분이 만나 함께 많은 분들 즐겁게 해 주시면서 행복하게 잘 계시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