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90년대 초반 영화 ‘장군의 아들’을 기억합니다. 영화의 흥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배우가 있는데 바로 배우 박상민이다.
당시
나이는 20세였는데, 어린 김두한이 아직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역할을 잘 소화했다.
‘잠들면 스타가 됐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고, 당시 청춘의 우상을 넘어 영웅적인 행보를 보였다고 한다.
또한 대부분의 배우들이 받기 힘든 청룡영화상 인기스타상을 2년 연속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강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이후에는 끝없는 쇠퇴에 빠졌습니다.
1970년 삼남 중 막내로 태어난 박상민은 아버지가 엄청난 부유한 의사이자 병원장이었던 덕분에 어려서부터 부족함 없이 잘 자랄 수 있었다.
게다가 그의 형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된 엘리트 집안 출신이었지만, 박상민만 유일하게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학교생활을 하면서 “네 동생은 그렇지 않은데 너는 왜 그러냐”는 말을 자주 듣곤 했습니다. 대학 2학년 때부터 술, 담배, 온갖 나쁜 짓을 했을 때에도. 중학교 때 집 사람들은 그가 부끄러워서 두 형만 데리고 갔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3학년 때 선배의 권유로 연극영화과에 진학하려고 했고, 45일 동안 벼락치기 공부 끝에 간신히 합격해 서울예대에 입학했습니다. .
스무살이 되자마자 그에게 큰 기회가 찾아왔다.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김두한 역을 맡는 것이었다.
당시 임권택 감독은 신문에 “익숙한 얼굴이 아닌 새롭고 신선한 얼굴을 선택해야 한다”는 김두한 역의 배우 모집 광고를 냈고 약 800명이 관람했다. 위로.
오디션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 태권도, 유도, 합기도 등 무술을 수련한 사람들로, 보통 몸무게가 90kg이 넘는다.
그러나 임권택 감독은 엄격한 무인형이 아닌 완벽함이 가득한 아름다운 얼굴을 원했고, 김두한 역에 어울리는 배우를 찾지 못해 답답함을 느꼈다.
그래서 스무살 박상민은 교수님의 권유로 <장군의 아들> 오디션을 보게 됐다. 그는 수영과 육상선수 출신 경험으로 체격이 좋았기 때문에 셔츠를 벗어 심사위원들에게 근육을 과시했다.
그러자 모두들 “드디어 얼굴은 잘생겼는데 몸매는 남자인 배우를 찾았다”며 만족해했다. 하지만 너무 의욕이 넘치는 탓인지 그는 자신이 무술의 전문가라고 거짓말을 했다.
결국
무술 시연 도중 너무 서투른 모습을 보여 임 원장이 거짓말임을 깨닫고 질책했고, 당시 박상민은 이 당혹스러움에 크게 당황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우울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영화 제작자가 두 번째 오디션을 보러 왔고 마침내 김두한 역에 캐스팅되었고, 이후 영화의 큰 성공에 힘입어 엄청난 인기를 얻으며 청룡영화상 인기스타상을 수상했다. 1990년, 1991년 2년 연속 수상.
이 시기 10대들은 박상민을 영웅으로 숭배했기 때문에 박상민의 인기가 엄청났다고도 한다.
하지만 화를 잘 내는 성격이라 길에서 행인이 알아보고 말다툼을 하면 그냥 지나치는 것보다 더 자주 싸웠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장군의 아들>로 알려졌을 때 여러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헤어진 뒤 집에 가는 길에 폭군을 만난 적도 있다.
몇몇 사람들은 “어? “저 사람은 박상민이 아니다”라고 말했더니, 그렇게 말다툼을 하고, 싸우다 정말 위험한 상황에 놓일 뻔한 적도 있다.
당시 박상민은 김두한 역 외에 연기 경력이 사실상 전무한 신인 배우였다.
별다른 기복 없이 빠르게 인기를 얻은 탓인지 충무로에서 인기 배우 행세를 하다가 결국 프로듀서와 감독들에게 촬영을 많이 당하게 됐다.
1995년 안성기, 김혜수와 함께 주연을 맡은 이명세 감독의 영화 ‘남자는 괴로워’에 출연해 수억 원의 보수를 요구하며 치료했다는 일화도 있다. 세트장에서도 젊은 제작팀이 너무 아쉽네요.
문제를 일으킨 이명세 감독에게 혼나다가 결국 감정이 폭발했다는 이야기는 전설로 남아있다.
데뷔 초 큰 인기를 얻었던 그는 이후 배우로서의 기회를 활용하기 어려워 이전의 큰 인기는 금세 사라졌고, 결국 ‘장군의 아들’이 그의 유일한 대표작이 됐다.
한편 박상민은 이미 3차례 음주운전 전과가 있다. 그는 1997년 음주운전 후 사고를 낸 뒤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피해자에게 2000만원, 목격자와 경찰에 각각 500만원을 줬다. 그의 매니저와 피해자가 폭로했다.
그다지 활동적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미 큰 부자였고 당시 부동산으로 많은 돈을 벌었고 덕분에 그는 연예계에서 가장 비싼 차를 운전하는 연예인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그러다가 2007년 노총각 시절 친구의 파티에서 첫 아내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했다.
이에 대한 분노가 결국 싸움으로 이어져 이혼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5년 간의 이혼 소송을 거치면서 몸과 마음이 많이 손상됐다. “그런데 지금은 누구 탓인지 궁금해서 그때부터 제 자신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어요.”
“결국 그 때는 밥도 못 먹고 팔까지 아프고 떨리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날 병원에 갔는데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살면 천국에 있을 거라고 하셔서 바로 입원시켜 주셨는데 저는 안 된다고 하더군요.
그러자 의사가 ‘이렇게 상태가 계속 악화되면 박상민 씨는 자신이 목숨을 잃거나, 다른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두 가지 경향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
이후 2019년 친구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나 1년 반의 교제 끝에 재혼했다.
또한
당시 마음속에 깊은 상처가 있어 오랫동안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했으나 지금의 아내에 대한 진실을 깨닫고 재혼까지 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박상민은 “결혼을 준비하면서 지금의 아내에 대한 감정도 키워가던 중 2018년에 건강검진을 받았고 림프종 진단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재검사 결과 오진으로 판명됐지만, 백혈병 진단을 둘러싼 갑작스러운 폭풍은 당시 나에게 큰 충격이었고, 내 인생을 되돌아보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 때는 오만함밖에 생각나지 않았고, 지금의 아내를 이대로 놔둬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인생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고민도 했습니다. ”
“그러다가 오진이라는 걸 알았을 때, 죽음에서 살아나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싶었어요. “’내가 먹는 음식, 내가 마시는 술이 너무 맛있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어요.”
“지금의 아내를 만났을 때 내 삶은 마침내 올바른 방향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계속해서 좋은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보여줄 게 없다며 은퇴한 좋아하는 외국배우. 매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게 배우의 DNA 아닐까. 그래서 언제쯤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 그리고 연기하는 것과 함께.
인생이 영화 같았던 배우 박상민은 <장군의 아들> 시대에 모두를 즐겁게 했던 배우로 지금도 많은 팬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다시는 곤경에 처하지 않도록 그의 앞날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