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혼자서 걷지 못하게된 상황…”잘 지내는가 싶더니..” 트롯 가수 박현빈이 최근 전한 눈물겨운 소식을 알아보세요..

원조 트로트 황태자 박현빈, ‘행사의 제왕’이라고 불리던 그는 전성기 시절 하루에 무려 여덟 군데의 무대에 섰고 어마어마한 수입을 벌어들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수중에 남는 돈은 전혀 없었다는데요.

오늘은 박현빈의 안타까운 사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지금에야 젊은 트로트 가수들이 대거 등장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트로트는 중장년층의 전유물이라는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그때 혜성처럼 등장한 젊은 트로트 가수가 바로 박현빈이었는데요.

박현빈은 82년 스타 노래 강사 어머니 정성을과 색소폰 연주자였던 아버지 박성원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에는 예술 쪽에 재능이 있는 인재가 많은데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이모 정진향 역시 유명한 노래 강사고 형 박지수는 성악가이며 이종사촌 동생은 배우 이윤지입니다.

 

 

이렇게 선천적으로 재능을 타고난 박현빈은 2006년 20대의 나이에 데뷔해 단숨에 트로트계의 황태자로 급부상했습니다.

20대에 데뷔를 치른 박현빈은 잘생긴 외모와 성악을 전공해 탄탄히 다져진 노래 실력으로 단번에 사람들을 매료시켰고, 트로트를 즐기는 연령까지 낮췄습니다.

지금에야 트로트라는 장르가 대세가 되어 경쟁자가 많아졌지만, 그는 한때 행사라는 행사는 모두 휩쓰는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는 하루 평균 5번, 많을 때는 무려 여덟 군데 그 행사 무대에 섰다는데요.

보통 트로트 가수들의 행사비가 1회당 수천만 원을 훌쩍 넘는다고 알려졌기에 그의 수입 역시 어마어마했을 겁니다.

항간에는 박현빈이 준 재벌급의 재산을 비축해 뒀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실제로 ‘곤드레만드레’로 활동할 당시 그는 쉬는 날 없이 여기저기서 부름을 받았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당시 그는 한 달의 행사를 약 200 군데 가까이 다녔다는데 아침부터 점심 저녁 밤무대까지 돌고 몸이 아픈 날에도 링거까지 맞아가며 행사를 소화했습니다.

박현빈이 받는 행사비에 대한 구체적인 액수는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대략 1000만 원 선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회당 1000만 원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는 한 달에 행사로만 20억 가까이 버는 셈입니다.

 

게다가

방송 활동도 왕성하고 다른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실제 수익은 훨씬 더 웃돌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박현빈은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도 수중에 돈 한 푼도 남아 있지 않다고 고백해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넉넉했던 박현빈의 집안은 IMF를 겪으며 급격히 기울었고, 나빠진 가정 형편 때문에 박현빈은 여러 불편함을 겪어야 했습니다.

박현빈이 성악을 전공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인데, 원래 박현빈은 성악이 아닌 바이올린을 전공하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성악과를 진학한 박현빈은 등록금 역시 스스로 마련해야 했는데 그마저 여의치 않아 보이자 학업을 쉬고 입대하게 됐습니다.

20살 때부터 등록금도 스스로 마련해야 했고, 학교를 못 다니고 군대에 가 성악병으로 입대한 박현빈은 군 행사를 다니며 트로트 가수의 꿈을 꾸었고 제대 후 남자 장윤정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장윤정의 소속사를 찾아가 오디션을 보게 되었습니다.

소속사는 처음 박현빈을 탐탁지 않게 여기며 그를 영입할 것을 거절했지만, 박현빈은 끈기 있게 그들을 설득해 나갔습니다.

특히나 오랫동안 다져진 성악 실력이 관계자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렇게 ‘빠라빠빠’라는 싱글 앨범과 함께 데뷔한 박현빈은 거의 데뷔와 동시에 주목받았고, 이후 ‘앗 뜨거’, ‘곤드레만드레’, ‘샤방샤방’, ‘오빠만 믿어’ 등 연이은 히트곡을 발표하며 최정상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여기저기서 그의 노래가 울려 퍼졌고, 방송은 물론 행사에서까지 그는 섭외 0순위로 급부상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큰 인기와 그에 걸맞은 수입에도 박현빈의 자산은 좀처럼 불어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한 방송에서 ‘곤드레만드레’ 활동 당시에 통장에 남은 돈이 0원이었다고 밝혀 모두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도대체 그렇게 행사를 많이 뛰고도 돈이 없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가

수중에 돈 한 푼 남지 않았던 것은 가족들 때문이었습니다.

부모님과 형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자신을 포함해 총 여섯 식구의 생계를 책임졌던 박현빈인데요.

 

버는 돈은 좀처럼 모이지 않았습니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매우 강했던 건데, 지금도 박현빈은 한 아파트에서 부인과 아들딸은 물론 부모님 조부모님 외삼촌네 식구들까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가족애가 대단한 것입니다.

가족들에게 돈을 썼다고 해도 어떻게 한 푼도 안 남을 수 있느냐는 궁금증이 생기는데, 여기에는 이미 있던 엄청난 빚이 한몫했습니다.

박현민의 어머니 정성을 씨는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던 때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수십억대의 엄청난 빚을 지며 절망적인 삶을 살았고, 도전하는 사업마다 연거푸 실패했고 결국 중소기업체들이 질만한 어마어마한 빚을 졌다. 희망이 안 보였다. 빚 다 갚고 죽자는 것이 삶의 목표였다”

부모님이 힘들어하시는 걸 본 박현빈은 자신이 짐을 나눠서 지기로 결심했습니다.

“지금 정리가 안 되면 어차피 내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이 빌린 돈까지 모두 수첩에 적어 하루 벌어올 때마다 갚고 수첩에서 지워나갔다”

부모님이 진 빚을 모른 체할 수도 있었지만, 박현빈은 아주 적은 금액까지 수첩에 적어 다니며 채무를 갚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어

그래서 이번 행사를 쉴 수 없이 달려왔습니다.

“한 달에 150~200번 정도 무대에 오르고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잠도 잤어요. 또 다른 곡 ‘오빠만 믿어요’ 작업을 하던 즈음, 드디어 남은 빚 1000만원을 갚았고, 20년 만에 ‘가계 빚이 사라졌다. 그날 가족 모두가 울었다”고 말했다.

너무 바빠서 몸이 아플 때도 있었지만 박현빈은 그때도 수액 주사까지 맞으면서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데뷔 후 2년 동안 빚을 갚느라 만원 한 장도 손댈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빚을 다 갚고 행복만 남았다고 생각한 순간, 박현빈의 다음 시련이 찾아왔다.

박현빈은 2016년 4월 29일 서해안고속도로 출포IC 부근에서 4중 추돌 사고를 당했다.

 

차는

폐차가 될 정도로 파손되었고 박현빈은 오른쪽 다리 허벅지 골절상 운전했던 매니저는 안면이 함몰될 정도로 큰 사고였습니다.

오른쪽 대퇴부와 정강이뼈가 산산조각이 난 박현빈은 두 번의 수술을 겪었고, 1년 반을 꼼짝없이 병상에 누워 지내며 몸과 마음 모두 아파했습니다.

“가족을 다시 못 볼 것 같다는 두려움이 있었고, 걷지 못하게 될 거라는 두려움도 있었다. 치료 후에도 오래갔다.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6년간 연애한 김주희와 결혼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라 더 마음이 아팠을 겁니다.

많은 걱정 속에 슬픈 시간을 보내고 다행히 그의 몸은 점차 회복되어 갔습니다.

웬만하면 차량 탑승을 꺼리는 트라우마를 갖게 되었지만, 꾸준한 치료로 정신건강 역시 많이 나아졌습니다.

잠시도 쉬지 못하고 일을 하며 번 돈으로 수십억의 빚을 대신 갚아준 박현빈은 원래부터 책임감 넘치고 가족애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앞으로도 그의 몸과 마음이 다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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