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름다운 얼굴은 어디로…” 최근 몰라보게 변해버린 가수 문주란의 충격적인 근황.. “결혼이 뭐라고..”

당시 문주란 씨는 아직 10대 소녀에 불과한 19살이었습니다.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에게 쏟아지는 근거 없는 소문들로 그녀는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또한,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 불과했던 소년은 치열하고 비리가 난무했던 당시 연예계도 참기가 어려웠고 자기 생활 하나 없이 어디론가 끌려가 늘 노래를 불러야 하는 것도 싫었고 연예인으로 살기 위한 각종 얽매임도 그녀의 목을 조여 왔습니다.

더구나 가족도 그녀의 안식처가 되지 못했죠.

 

 

급기야 그녀는 약을 모으기 시작했고,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이때는 남자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고 강조하더라고요.

 

아직

이 남자를 만나기 전부터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많은 소식통에 따르면 그가 이런 극단적인 시도를 한 것은 시련의 상처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건 아니었어요.

약을 너무 많이 먹어서 15일 만에 깨어났다고 합니다.

다른 방송에서는 이틀 만에 깨어났다고 한다.

아무튼 간신히 살아남았는데, 살아남았음에도 사실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다.

그 후 그녀는 이 세상을 떠나려고 여러 가지 끔찍한 시도를 했습니다.

그러던 중 막내딸처럼 그녀를 사랑했던 박춘석은 그녀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켜 정신을 차리게 했다.

정신병원에 갔더니 미칠 것 같았다고 하더라고요.

다시는 그러지 않기를 기도하고 기도했고, 약 10일 후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절망적인 마음에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었을 때, 나는 첫사랑을 만났습니다.

제가 22살쯤 되던 어느 날, 대구 콘서트에서 만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수많은 남자들 사이에서 나의 첫사랑은 유부남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업보라고 하는 것 외에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문주란이 정서적으로 안정된 가정에서 자랐다면 과연 이 남자를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할 수 있었을까?

문주란은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으며, 아버지가 재능을 물려주었지만 자유로운 삶을 살았고 자식들에게는 엄격했다고 말했다.

 

또한

친형제 자매들과 사이도 좋지 않아서 지금은 왕래도 하지 않는다는 말까지 얼핏 비친 적이 있어요.

그녀는 너무나 외로운 아이로 자라났고 주위에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자 그렇게 정신없이 빠져버린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를 어떻게 기억할까요?

 

 

‘남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한 번 갔다가 돌아오더라도 한 남자와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그런 여자의 인생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여자로서의 인생은 실패했다’라고 말하며 후회하는 모습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더욱 후회할 만한 마지막 결말도 있었죠.

세월이 흐른 문주란 씨가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를 마치고 객석을 돌면서 인사를 드리고 있는데, 거기에 그 남자가 떡하니 앉아있었다고 합니다.

문주란 씨를 보러 온 것이 아니었다고 해요.

어떤 여자와 함께 왔다고 하는데요.

부인의 얼굴을 알고 있는 문주란 씨가 어떤 여자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부인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자기를 보고 굉장히 당황해하고 미안해하는 표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절망감을 느꼈나요?

그리하여 그녀는 20대에 첫사랑을 만난 이후 독신으로 지내며 이제 70세가 넘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문제뿐 아니라 고통도 끝이 없었습니다.

1972년 23세 때 서울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준비하던 중 큰 화재가 발생해 뒤에서 누군가가 밀어내 2층에서 추락했다. 창문.

덕분에 불은 면했지만 척추를 심하게 다쳐 4개월간 병원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다행히 신경은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1986년에 나는 교통사고를 당해 심각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1년 정도 병원에 입원해야 했어요.

그래서 점차 활동이 줄어들었어요.

1993년 가수 활동을 접고 음식물 쓰레기 처리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를 설립했다.

지금은 완벽하지만 시대를 앞서 있습니다.

2년 동안 사업에 실패해 벌어들인 돈을 모두 잃고, 살 곳도 없이 남겨졌다고 한다.

파산선고를 한 후 빚을 갚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생애 처음으로 작업실에서 6개월간 생활했다고 한다.

 

하지만

2년 만에 빚을 모두 청산했다고 합니다.

말하기는 쉬워도 당시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당시 나쁜 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해요.

이후 또다시 사업을 시작합니다.

1999년부터 20년 정도 경기도 청평에서 라이브 카페를 운영했어요.

돈은 벌었지만 사람들에게 치이면서 상처를 받았고 스트레스도 많이 쌓였던 것 같습니다.

“정말 아주 힘들었어요”

결국, 사업을 접고 경기도 청평에서 400평대 카페 겸 전원주택에서 살다가 서울 아파트로 이사 와서 마음이 굉장히 편하다고 합니다.

다시는 사업을 안 한다고 하고요.

빚만 없어도 감사하며 산다고 이렇게 많은 시련을 겪고 불행한 개인사였지만 그녀를 절대 포기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사랑해 준 단 한 명의 남자가 있었죠.

바로 박춘석 씨였습니다.

박춘석 씨의 문주란 씨에 대한 애정은 대단해서 씨를 패티 김, 이미자 씨보다 더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고 해요.

그런데 잘못된 사랑으로 인생을 망친 거나 다름이 없었는데요.

박춘석 씨는 그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문주란 씨는 박춘석 씨를 아버지처럼 따랐지만 그의 말을 잘 듣지 않은 말썽꾸러기였다고 해요.

그녀는 너무나 연예계 생활에 지친 나머지 자기를 모르는 곳으로 한때 외국으로 이민을 가려고 했는데, 박춘석 씨가 이 곡 한 곡만 부르고 가라고 하면서 ‘공항의 이별’이라는 곡을 만들어 줍니다.

 

한편

곡이 히트하자 무려 6개의 ‘공항’ 시작 시리즈의 노래가 나왔어요.

그 정도로 박춘석 씨는 문주란 씨를 아꼈는데 박춘석 씨는 1994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무려 16년간 투병하다가 2010년에 별세 하셨는데요.

별세 전에 문주란 씨가 보고 싶으셨는지 거동도 불편한 그가 휠체어를 타고 그녀가 하는 카페에 예고도 없이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 카페에는 박춘석 선생님이 젊었을 적 이미자, 남진 씨 등과 찍었던 추억의 사진들이 있었는데, 사진을 보고 선생님이 갑자기 눈물을 터트렸어요.

뇌졸중으로 자기가 얼마나 크게 우는지 감이 없었던 그는 엄청나게 큰소리로 울었고 광경을 지켜보던 관객들 모두 함께 따라 울었다고 합니다.

그날 문주란 씨는 박춘석 씨의 곡들로만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

부르는 문주란 씨도 울었고 다 같이 울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게 살아생전 마지막 만남이라고 합니다.

그 후 2년 뒤 돌아가셨다고 하죠.

그의 울음이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얼마나 많은 감정을 서로 교류했을까요?

박춘석 씨가 하늘나라에서도 아름다운 음악이 둘러싸여 행복하게 지내시기를 기원해 봅니다.

문주란 씨는 박춘석 씨의 사랑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