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년 79세 일기로 윤정희 결국…” 생각 이상의 분들이 이들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접하고 같이 슬피할 수 밖에 없었는데요.

60년대 문희, 남정임과 함께 제1세대 여배우 트로이카 중 한 명이었던 대배우 윤정희 님께서 19일 향년 79세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그동안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팬들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했는데요.

게다가 남편 백건우 씨와 딸과 함께 파리에서 투병 중이었던 고인에 대한 모습이 거의 공개되지 않아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었죠.

아무튼 잘 지내시길 바랐던 팬의 간절한 소망을 뒤로 한 채, 21일 별세 소식을 듣게 되어 가슴이 먹먹해지다 못해 크게 구멍 난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윤정희 님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세상을 떠나기 전에도 소송에 휘말려 눈도 편히 감지 못했는데요.

대체 어떤 사연으로 윤정희 님은 세상을 떠나야 했으며, 어떤 이유로 소송의 희생양이 돼야 했을까요.

 

 

오늘은 그녀를 그리워하며 윤정희 님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윤정희는 6남매의 장녀로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습니다.

 

해방이

된 후에야 아버지가 부산의 언론사의 기자로 취업이 되자, 전 가족이 부산으로 이사를 하면서 부산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죠.

6.25 전쟁 후인 1950년대 중반에 다시 광주로 이사를 했는데, 외갓집이 광주 인근에서 큰 공장을 운영하면서 아버지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광주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낸 윤정희는 학업에 열중하여 호남의 명문인 전남여중과 전남여고를 졸업했죠.

여고를 졸업한 윤정희는 조선대학교에 진학했는데, 대학교 재학 시절이었던 1963년에 미스코리아 선발 대회에 출전해 미스 전남 미에 당선되었지만, 서울에서 열린 본선에서는 예선에서 탈락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미스코리아 본선에 진출할 정도이면 상당한 미모였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당시 여대생이었던 윤정희는 지성과 미모를 겸비했던 재원이 아니었나 싶은데요.

그러고 보면 윤정희는 미인대회 출신으로 성공한 최초의 여배우일 겁니다.

대학 졸업 이후, 윤정희는 1966년 6월 ‘청춘극장’의 여주인공 ‘오유경’ 공모에서 12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당당하게 합격하죠.

그해 7월부터 ‘청춘극장’의 촬영은 시작되었으며 당대의 톱스타인 신성일과 공연하게 되는데요.

 

 

이 영화는 1967년 1월 1일 서울 국제극장에서 개봉된 후 38일간 장기 상영되어 27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흥행 대박을 터뜨리면서 윤정희는 데뷔작 단 한 편으로 바로 스타덤에 오르죠.

윤정희는 데뷔 1년 만인 1967년 청룡영화상에서 김지미, 남정임 등과 함께 바로 인기상을 수상할 정도로 급성장하였으며, 국내 각 영화상에서 여덟 개의 신인상을 수상했는데 그야말로 혜성처럼 나타난 여배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1968년부터 윤정희의 인기가 폭등하자 각종 cf 출연이 쇄도했고, 이는 윤정희가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여배우로 우뚝 섰음을 말해주죠.

또 당시 톱스타였던 문희, 남정임과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하면서 제1대 트로이카 여배우로 맹활약했습니다.

1969년부터 1972년까지 4년간은 윤정희, 문희, 신성일, 신영균 등 네 사람이 납세 연예인 순위 1위에서 4위를 기록할 정도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는데요.

1969년 어느 가을날 아침, 윤정희가 영화 ‘동경의 왼손잡이’의 남산 촬영을 위해 집을 나서려는 순간에 한 통의 전화를 받습니다.

국방부라고 밝힌 남자는 자신을 육군 대위로 소개하면서 베트남에서 며칠 전에 귀국했다는 말을 했죠.

그가 전화를 한 이유는 자신의 부하 때문이었는데, 베트남 전선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소대장이었던 중사가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는 가슴 아픈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는데요.

시체를 수습하는 과정에 전사한 병사의 철모와 포켓 등에서 온통 윤정희의 사진만 나왔다고 하면서 국립묘지에서 거행되는 그의 장례식에 참석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하는데 윤정희는 그 자리에서 꼭 참석하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당시 그녀는

5~6 편의 영화를 동시에 찍는 중이었는데, 각 영화사의 제작 상무와 감독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한 뒤에 다음 날 스케줄을 비워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하는데요.

그리고 그녀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군인의 장례식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1960년대 말 윤정희의 가치는 그녀의 출연료로서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는데, 1969년에는 ‘비운의 왕비’에 출연하며 130만 원을 받으면서 한국 배우 최고 출연료를 경신하기도 하죠.

그리고 1970년대 동양방송 드라마 출연 당시 최고 출연료인 회당 2만 원을 받아 언론의 주목을 받았는데요.

윤정희는 1년에 최소 40편 일주일에 한편 꼴로 영화를 찍었던 세월을 뒤로하고, 1973년 여우주연상 수상 소감에서 데뷔할 때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프랑스 유학을 발표합니다.

 

1972년

뮌헨 문화올림픽과 윤이상의 오페라 ‘심청이’가 동시에 열려 효녀 심청으로 신상옥 감독과 참석했는데, 오페라 계단에서 백건우를 처음 보고 한국인임을 알아보고 ‘자리가 어디냐’라고 물어봐 친절하게 도움을 받았죠.

공연이 끝나고 윤희상 선생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그 청년이 윤이상 선생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고, 그가 피아니스트 백건우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백건우는 윤이상과 잘 아는 사이이며, 독일 뮌헨의 연주 여행차 왔다가 ‘심청이’ 오페라도 보러 오게 된 것이었는데 이때 윤이상의 소개로 둘이 알게 됩니다.

회식에서 나이 든 사람들을 제외하고 젊은 친구들만 모여서 따로 맥주를 마시러 갔는데 적극적이고 잘 놀던 다른 유학생들과 달리 수줍음을 많이 타고 말도 적었던 백건우가 윤정희의 눈에 띄었죠.

 

그러던 중

백건우가 윤정희에게 꽃 선물을 건넸고 서로에게 호감을 가졌는데, 신상옥 감독이 백건우에게 파리 지리를 잘 모르므로 도와달라고 부탁하여, 파리까지 동행했다가 업무를 마치고 헤어집니다.

그 후 한국에서 오라는 요청이 쇄도하여 급히 귀국한 후 백건우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마는데요.

윤정희는 1974년 서강대 총장 신부 도움으로 프랑스로 유학을 가게 되고, 평범한 학생으로 소르본느 대학교에서 유학을 시작하죠.

어느 날 친구와 영화를 본 후 한국 교포들이 자주 찾는 짜장면이 유명한 광명식당으로 갔다가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려는 순간 백건우가 들어오는 것을 보며 놀라고 말았는데요.

둘은 연락을 한 적도 없었는데 우연히 2년 만에 만난 것이었고, 이후 둘의 연애가 시작되고 유명세 탓에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지는 못하고 비밀리에 연애를 이어가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대사관 초청 모임에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마지막에 둘만의 시간을 보냈고, 백건우가 ‘이곳에 집을 마련하자’라는 제안을 해와 처음엔 결혼 전엔 그럴 수 없다며 거부했으나, 사랑이 커지자 곧 목마르트 언덕의 작은 방 하나를 얻게 되었고 부모님에게도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같이 생활하는데요.

언론에 알려지지 않기 위해 차에서 내릴 때도 다른 방향으로 내리는 등 보안을 유지했고, 비밀 연애를 이어가던 중 부모님처럼 모시던 화가 이응로 선생 앞에서 둘의 결혼 계획을 알리면서 둘의 관계가 만천하에 알려지게 됩니다.

 

파리에서

사실상 실직자였던 탓에 백건우의 비서 역할을 도맡아 했는데, 음악회를 가면 사진 촬영 인터뷰 등등 스케줄이 많은데 남편이 연습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다른 일을 정리하는 역할을 맡았죠.

항상 같이 있으니 휴대전화도 두 대가 필요 없어 하나를 같이 썼다고 합니다.

그러다 2019년 백건우 씨의 인터뷰를 통해 윤정희 씨가 10여 년째 알츠하이머 투병 중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는데요.

2021년 알츠하이머 투병 중인 원로 배우 윤정희가 프랑스에 방치됐다는 청와대 국민청원 글이 올라오고, 남편이자 유명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공연 기획사를 통해 이를 강력히 반박했습니다.

윤정희 씨의 투병 생활을 놓고 윤정희 씨 동생들과 남편 백건우 씨의 공방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데 과연 진실은 뭘까요.

 

윤정희 씨의

본명은 손미자인데요.

손아래 동생으로 파악되는 손병욱 씨는 “윤정희는 백건우와 함께 수십 년 살던 집을 떠나 다른 집에서 홀로 생활하고 있다”라며 강제로 별거 당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윤정희 씨는 손아래 형제 자매 5인을 두고 있는데, 그중 손병욱 씨를 비롯한 손미현, 병욱 씨 3인은 지난해 11월 프랑스 파리의 고등법원에서 윤정희 씨의 후견인 자격 취득에 실패했고, 이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글에 ‘외부와 단절된 채 하루하루 쓰러져 가는 영화배우를 구해주세요’라는 호소문을 올렸죠.

이에 남편 백건우 씨는 소속사 빈체로를 통해 “근거 없는 주장”이라며 가족의 따뜻한 돌봄 아래 생활하고 있다고 반박했습니다.

작년 윤정희 씨 세 동생의 후견인 자격 부여를 거부한 파리 고등법원의 판결문은 “윤정희는 안전하고 친숙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노인 요양 시설에 입소하지 않고 매우 안락한 조건을 누리고 있고, 건강 상태를 고려할 때 윤정희의 여동생 자택에서 거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라고 밝혔는데요.

윤정희 씨는 서울 여의도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의도의 한 공인중개사는 윤정희는 24평, 36평짜리 두 채를 2000년대 초반에 구입했으며, 24평은 임대를 줬고, 36평에는 윤정희의 막내 동생이 살고 있다고 설명했죠.

그는 “아파트 시세는 각각 18억, 22억 원 정도이고, 오래된 아파트이기 때문에 전월세 가격은 낮은 편”라고 덧붙였는데요.

윤정희 씨의 아파트에 거주 중인 여동생은 당시 소송에서 빠졌습니다.

윤정희 씨의 동생들이 프랑스 소송 패소에 이어 국민청원을 게시하면서 금전 문제가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했지만, 이들은 결코 “돈 때문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는데요.

 

손미현 씨는

금전적 문제는 전혀 없다고 했고, 손병욱 씨는 우리 형제들은 스스로 살아가는 데 문제가 전혀 없다고 반박했죠.

또한 “직계 가족이 있는 형제 명의의 재산을 어떻게 노릴 수가 있나. 가능하기나 한가?”라고 되물었으며, 손미현 씨는 “우리가 원하는 건 큰 언니 윤정희의 건강과 편안한 여생뿐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윤정희 씨의 성년 후견인은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는 딸인데요.

딸은 프랑스 법원에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어머니의 성년 후견인 지정을 신청해 승인을 받았고, 2020년에는 국내 법원에도 성년 의견 개시 심판을 청구했습니다.

그러나 고인의 동생들은 윤정희 씨가 남편인 피아니스트 백건으로부터 방치됐다며 딸을 성년후견인으로 지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왔죠.

법원은 윤정희 씨 동생들의 이의 제기를 받아들이지 않고, 2심까지 딸을 성년후견인으로 지정했지만, 윤정희 씨의 동생들이 법원 판단에 재차 이의를 제기하면서 소송은 대법원에 계류 중이었습니다.

대법원은 성년후견 대상자인 윤정희 씨가 사망한 만큼 사건을 추가 심리하지 않고 각하할 전망입니다.

 

윤정희 씨의

남편인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는 오늘 밝힌 입장문에서 “제 아내이자, 오랜 세월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배우 윤정희가 19일 오후 5시 딸 진희의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꿈꾸듯 편안한 얼굴로 세상을 떠났다”라고 전했습니다.

이어 그는 “생전에 뜻에 따라 장례는 파리에서 가족과 함께 조용하게 치를 예정”라면서 “한 평생 영화에 대한 열정을 간직하며 살아온 배우 윤정희를 오래도록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영화계에 따르면 유족들은 평소 고인과 함께 찾던 파리의 한 성당에서 삼일장을 치르고 유해는 파리 인근 묘지에 안장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죠.

저는 그녀가 우리나라의 한 세대를 대표하는 여자 배우라는 인식을 강하게 갖고 있었는데요.

이로써 우리의 한 시대가 마감하였다는 느낌이 듭니다.

천국에서 편안히 쉬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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