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트로트 가수 유지나…” 잘 사는가 싶더니 결국?! 그리고 공개된 그녀의 놀라운 근황과 충격 재산 수준..

‘외도’란 무엇인가 사전에는 아내와 남편이 아닌 상대와 사랑하는 일로 바르지 아니한 길이나 노릇이라고 설명돼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배우자가 외도를 했다면, 다른 배우자나 자녀들 모두에게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일로 특히 배우자의 부정을 알게 된 충실한 배우자는 마치 세상을 그만 살고 싶을 만큼 가슴 아픈 고통을 겪게 되고 정서적으로 황폐하게 된다고 하죠.

그래서 남성이건 여성이건 간에 배우자의 외도를 알게 된 것이 자신의 일생에서 최악의 경험이었다고 진술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는데요.

하지만 오늘의 주인공 가수 ‘유지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나쁜 사람도 있구나 싶었던 게 전 남편으로, 심지어 나중에는 친구와 눈이마저 두 사람이 외도를 하는데 ‘아이고 잘 됐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면서 뛰쳐나올 수 있었던 유지나,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말해 보고자 합니다.

1968년 충남 부여에서 5남 1녀 중 귀한 막내딸로 태어난 유지나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새엄마가 아니었나 할 정도로 그녀를 많이 부려먹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집에는 아들밖에 없으니까 엄마가 밭에 일하러 가면 늘 그녀가 가마솥에 밥을 하고 불을 때고 고추장찌개를 끓이며 집안 살림들을 도와야 했죠.

또한 그 시절 도토리 열매가 열리면 어김없이 어머니가 ‘야, 저 집이 지금 도토리 다 줍는다 뭐 하냐’라고 하면, 오빠들은 하나도 안 줍고, 생활력이 강했던 어린 유지나가 열 단지씩 채워놓곤 했습니다.

 

이처럼

늘 혼자만 고생하다 보니, 가끔은 짜증을 내기도 했었는데 하지만 그럴 때마다 어머니가 ‘짜증은 내어서 무엇하나 릴리리야 릴리리야’ 이런 노래를 부르자, 결국 그걸 같이 주고받고 하다 보니 그게 몸으로 익혀져서 그때부터 민요와 판소리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녀의 아버지는 귀한 막내딸을 유난히 아끼셨는데, 당시 아버지가 항상 친척분들한테 하셨던 말이 ‘야. 너희 집 딸 넷이지. 우리 집에는 딸 하나 있는데, 얘 잘 봐둬라 저거 물건이다. 나중에 엄청 잘 될 애야. 우리 딸은 못하는 게 없어’라고 하며 그녀를 사랑해 주곤 했습니다.

그래서 이때 그녀가 아무리 힘들어도 아버지의 긍정적인 역량으로 ‘아, 나는 잘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며 긍정적으로 살 수 있었고,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아버지는 천년 만년 자신의 곁에 계실 줄 알았는데, 하지만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부터 그녀의 집은 너무나도 가난하게 살기 시작했고, 그리고 당시 판소리를 하던 그녀가 사실 피아노도 배우고 싶고, 한국 무용도 배우고 싶고, 장구도 배우고 싶고 하고 싶은 건 너무 많은데 오직 판소리 하나만 배울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싫었다고 했습니다.

아무튼 이후부터는 어머니가 남의 집 여관에서 일을 하며 거기서 음식 남은 거를 몰래 가져와 육남매를 먹여 살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 판소리 유망주였던 그녀는 14살 때부터 특출났던 소리꾼으로 전국 국악 콩쿠르 최우수상까지 수상하자, 당시 선생님이 어머니에게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이 아이는 재능이 정말 많으니 꼭 서울로 유학을 보내라’라는 권유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어머니와 오빠들이 ‘없는 살림이라 절대 안 된다’라며 반대를 했고, 그런데 유지나가 당시 손가락 걸고 약속한 게 ‘고등학교만 딱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국악 선생님을 하고 결혼해서 애 10명 놓고 살겠다. 대학은 절대 안 갈 테니 걱정 말아라’라는 약속을 하자 가까스로 서울 국악 예고로 유학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고3 이 되자 반 친구들이 다들 대학 간다고 원서를 내는데, 자신만 원서를 못 내자 ‘내가 어디가 못 나서 학교를 못 가나’ 싶어 결국 엄마 몰래 원서를 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마침 KBS에서 전국 국악 콩쿠르를 했는데, 그녀가 ‘심청가’로 대상을 차지했고, 그랬더니 대학교에서 4년제 장학금을 주겠다며 오라고 하는데 단, 입학금 87만 원은 있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이후 시골에 내려가서 입학금 87만 원만 주면 나머지는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얼마든지 다닐 수 있으니 제발 입학금만 달라고 했고, 그러나 고등학교 때도 돈이 많이 들어갔는데 대학이 웬 말이냐면 엄마와 오빠가 난리가 나면서 결사반대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당시 그녀가 입학금을 위해 울고불고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그래서 결국 최후의 보루로 이틀간 일어나지도 않고 쓰러진 척을 하며 잠만 잤고, 그러자 놀란 어머니가 어디서 87만 원을 급하게 빌려와 입학금을 주시면서 그제서야 마침내 대학에 진학하게 됩니다.

아무튼 입학금을 내고 서울로 올라와 아르바이트란 아르바이트는 다하며 대학 생활을 이어갔고, 그런데 이때 훗날 그녀의 고백에 따르면 본인이 워낙 예쁘다 보니 남자들이 버스 타면 버스에서 따라오고, 기차 타면 기차에서 따라오고, 길을 걸으면 길에서 따라오는 남자들이 자신만 보면 모두 자기 스타일이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무렵 그녀의 나이 20살 때 노들제 가요제를 나가면서 마침내 처음으로 티비에 나오게 되었고, 또한 내심 ‘대상을 받지 않을까?’ 기대를 했었는데, 겨우 가창성을 주자 당시 속으로 ‘IC 뭐야. 대상도 아니고’라며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대상~ 유지나’라며 그녀의 이름을 또 불렀고, 이처럼 가창상과 대상을 동시에 거머쥐자 당시 감독님들이나 담당하시는 분들이 그녀가 정말 큰 스타가 되는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아무튼 당시 그녀는 돈 버는 게 급급해서 최대한 빨리 성공하고 싶었고, 그러던 차에 김연자가 자신의 디너쇼에서 그녀를 게스트로 몇 번 불렀는데, 그때 김연자 소속사 사장이 ‘트로트 해 볼 생각 없냐’라고 하자, 고심 끝에 결국 국악을 접고 트로트를 하기 위해 가요계로 넘어오게 됩니다.

그렇게 트로트로 넘어오며 데뷔를 떠오르는 별처럼 아주 화려하게 했지만, 그것도 잠시뿐 이후 그녀는 1~2년도 아닌 무려 20년간 무명 가수의 길을 걷게 되는데, 그래서 결국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모진 세월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그녀가 고백하길 “내가 무명 가수로 20년을 보냈는데 당시 티비를 틀어 가요무대나 이런 게 나오면, 나는 절대 그 프로들을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내가 나와야 하는데 다른 가수들이 서 있으니 무대에 서고 싶어서 눈물이 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절 내가 반지하에서 산 적이 있는데, 딱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그런 지하방이었다. 그런데 영화에서처럼 실제로 하루는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는 날, 행사를 끝내고 문을 딱 열고 현관에 들어갔는데 물이 내 허리만큼 차있더라. 당시 살림살이 모두가 둥둥 떠다니는데 집에 물건이 그렇게 떠 있는 걸 처음 봤다. 결국 이런 집에서 빨리 탈출해야겠다 싶어 부동산 인력사무소에 찾아가 부잣집 동네 가사 도우미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부동산에서 하는 말이 ‘젊은 친구가 이런 걸 어떻게 하냐? 어차피 사모님들이 안 쓴다’라고 하더라. 그래서 결국 뭐 하려고 가요계에 와서 이런 고생을 하나 그래도 거기 판소리에서는 1등도 하고, 했는데, 트로트는 아니구나 싶어서 다시 판소리 전향까지 생각했었다”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이후 그녀는 트로트 가수로서는 도저히 답이 안 나왔지만, 미련을 못 버리고 무명가수로 활동하다가 다시 또 판소리로 갔다가 왔다 갔다 하면서 활동했고, 그런데 생활이 너무 어렵다 보니 결국 당시 가장 잘 나가던 선배 가수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부탁하게 됩니다.

“오빠 좀 살려주세요. 제 앨범 홍보 좀 해주세요”라고 했고 사실 그녀가 찾아갔던 선배는 바로 태진아로 옥경이 이후로 내는 곡마다 히트를 하니까, 사실 친한 사이도 아닌 대면대면했던 사이였는데도 불구하고, 무작정 찾아갔던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태진아가 그녀의 노래를 다 듣고는 대뜸 ‘돈은 좀 있냐’라고 물었고, 그러면서 생활비에 보태 쓰라며 돈 30만 원을 주는데, 당시 그녀에게는 돈 3000원도 귀할 때로 그 돈이 너무 고마워서 이후 30년이 넘도록 태진아에게 인사를 하며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서러운 무명 시절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살아가며 ‘나는 안 되나 보다’ 생각이 들 때쯤 나쁜 유혹들도 참 많이 오게 되는데, 당시 어떤 사람들은 ‘술집에 오면 돈을 주겠다’라고 하고 또 한 번은 ‘수위 높은 화보를 찍으면 10억을 주겠다’라며 그녀를 유혹하곤 했습니다.

지금도 크지만 23년 전에 10억이라는 금액은 그야말로 엄청난 돈이라 솔직히 흔들릴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녀의 고백에 따르면 “당시 500만 원짜리 전세를 살고 있었는데, 10억은 눈이 뒤집어지는 금액이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던 건 당시 가족들이 ‘너는 양반 집 딸이니까. 어디 가서 허튼 짓 하지 말라’라고 당부를 했기 때문에, 가족들 보기에 창피해서라도 차마 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이후부터는 확 뜬 건 아니지만, 민요와 트로트를 접목시킨 그녀의 노래가 사람들에게 조금씩 사랑받기 시작했고, 그러다 2001년 ‘저 하늘 별을 찾아’를 시작으로 이후 ‘쓰리랑’, ‘고추’ 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마침내 오랜 무명생활을 청산하고 전국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그렇게 드디어 가수로서 빛을 보며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지만, 그런데 이때 돈이 벌리니 벌레가 꼬이는지 그녀의 인생에 최악의 남자가 나타나게 되는데 그 사람은 바로 전 남편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그녀가 고백하길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나쁜 사람도 있구나’ 싶었던 게 바로 전 남편이다. 처음엔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인 줄 알고 시집갔는데 전혀 다른 사람이었고, 그때 내가 돈 버는 걸 아니까 그저 돈 빼먹으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난 그런 것도 모르고 가진 게 없는 사람이라도 내가 사랑하면 최고의 남자라 여기고 당시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시트를 데워놓고 뭐라도 따뜻하게 해서 주고, 옷도 전부 백화점에 가서 최고로 좋은 걸로 사다 주며 정성을 다해 내조했지만, 그 사람은 아주 작정하고 접근했던 거였다.

 

결국

그런 사람이란 걸 아는 순간 ‘이 사람은 아니구나’ 싶어 최대한 빨리 뛰쳐나오고 싶었다.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건 나중에는 내 친구랑 눈이 맞아서 두 사람이 만나는데 ‘아주 잘됐다싶었다. 아이고 잘됐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면서 그 일을 계기로 헤어질 수 있었다. 그렇게 내가 수업료는 많이 냈지만, 그래도 그때부터 절대 만나면 안 되는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이 생겼다. 물론 사람을 안 미워하려 하지만 살다 보면 ‘이 사람은 여기까지다. 더 이상은 안 되겠네’ 싶은 사람은 내 예상대로 틀림없이 잘 안 되더라”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유지나 그녀가 고백하길 “우리 가족들이 물론 다 각자 일을 하고 있지만, 내 가슴에는 장군이 있어서 여장부처럼 가족들을 다 챙겨야 내 마음이 편하다. 그런데 다음 생에는 가족들을 부양하는 장군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최고로 대하는 현모양처가 되고 싶다. 나는 내 남편을 최고로 대할 자신이 있고, 인생이 이런 거라는 걸 만들어 줄 수 있는 여자인데도 정작 내 곁에 둘 남자가 없다”

“그래서 요즘 나의 최종 꿈은 남자보다 60대 중반쯤이 되면 가수는 그만하고 노래하는 군수가 되고 싶다. 사실 군수가 하고 싶어서 2014년도에 학사 한 학기 남았던 걸 졸업했다. 석사도 16년도에 했다. 내가 군수를 꿈꾸는 이유는 내 고향에 어머니도 계시고 오빠들도 계시고 하니까 이번 생에 남자는 힘들 것 같고, 그냥 노래하는 군수가 되어 후배와 고향을 더 돕고 싶은 마음뿐이다”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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