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사 출신 트로트 가수 주현미.. “66살 남편과 결국 안타까운 소식이..” 조용필 마저도 긴장하게 만든 그의 놀라운 정체에 모두가?

가수 이미자 씨 이후 최고의 트롯계 디바 가수 주현미 씨.

남진

나훈아 시대 이후 침체기에 빠져들던 트로트계를 부흥시켰고, 그녀의 등장은 대한민국 가요계를 뒤흔들었다고 평가되었는데요.

이런 주현미 씨의 트레이드마크는 늘 밝게 웃는 모습입니다.

쏙 들어가는 보조개 또한 참 매력적이죠.

그런데 그 밝은 모습 뒤로 숨겨진 눈물들이 참 많았습니다.

속으로 울어야만 했다고 하는데요.

또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만한 일을 저지르기도 했다고 고백했는데요.

그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주현미 씨가 화교 출신이라 중국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은데요.

 

그녀는

1961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4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중국인이고요.

어머니가 한국인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어머니, 즉 친할머니가 또 한국인이더라고요.

 

 

그러니까 아버지도 반은 한국인이었던 거죠.

주현미 씨가 처음에는 화교 출신이라 당했던 서러움에 대해서는 얘기를 잘 안 했는데요.

워낙 자존심이 세거든요.

그녀의 아버지가 한의사, 남동생은 의사, 그리고 친척도 의사나 한의사가 많아요.

실제로 그녀도 약사 출신이죠.

 

그러나

화교인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솔직하게 털어놓았어요.

“제가 다문화 가정 출신이고, 아버지가 화교셨고 엄마가 한국 분인데,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 산다는 게 참 많이 힘들었어요. 속으로 많이 울었어요”

화교 출신이라는 남다른 삶을 살게 한 아버지는 그뿐만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그녀를 더욱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아버지 덕분에 가수로서 성공하게 되지만, 그 후에도 주현미 씨를 아주 힘들게 했어요.

아버지는 원래는 한의사였는데 사업에 손을 대서 가족들을 곤경에 빠뜨렸습니다.

 

 

아버지는 사업이 망하자 재기하고자 한국을 떠나 홀로 타이완, 즉 대만으로 가셨어요.

 

 

그러자

어머니가 아버지를 따라 또 대만에 가버리셨습니다.

졸지에 4남매는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친할머니 손에 키워졌어요.

그런데 갑자기 할머니까지 돌아가셔서 주현미 씨는 소녀 가장이 되어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했어요.

중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한창 부모의 돌봄을 받아야 할 나이에 오히려 동생들을 돌보면서 학교에 다닌 거죠.

특히 막내 남동생은 어머니처럼 자기가 데리고 잤는데, 아이들이 부드러운 것을 만지고 자는 습성이 있어 누나의 귓볼을 만지면서 잠이 들곤 했대요.

그런 남동생이 커서 의사의 꿈을 안고 의대에 들어갔는데, 결핵을 앓다 죽고 말았어요.

주현미 씨는 한 방송에 나와 ‘어린 시절 힘들게 자라서 그랬나’라는 말을 중얼거리더라고요.

이런 말을 할 정도로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눈물겨웠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현미 씨는 어린 시절 국적이 한국이 아니라 대만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일반 학교를 다닐 수가 없어 서울에 있는 화교 학교를 다녀야 했어요.

어렸을 때 동네에서 같이 놀던 아이들이 초등학생이 되어 다른 학교를 다니는 주현미 씨를 보고 점점 동네 친구들이 멀어져 버리는 그런 서글픔도 겪어야 했어요.

 

대학교는

중앙대학교 약대를 가게 되는데, 어머니가 자신이 겪었던 경제적 고통이 남편한테만 의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여자도 전문직으로 자립해야 한다고 딸을 설득한 것이죠.

화교 학교에서 중국어만 사용하고 교과서도 중국어로 되어 있고, 노래도 중국어로 불렀던 그녀였기에 대학교에 들어가서 한국어로 공부하는 데 적응하는데 애로가 많았어요.

1년 유급이 되어 5년째 되어서야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졸업 후 어머니의 바람대로 약국을 차렸는데 약국은 거의 망해가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당시는 의약분업이 되지 않았을 때로 손님들이 증상과 상관없는 약이나 함부로 먹으면 안 되는 항생제 등을 주문하곤 했어요.

그러면 주현미 씨는 학교에서 배운 대로 ‘그러면 안 된다’라고 말하니까, 까다로운 약사로 소문이 나 손님이 점점 안 오게 된 것이었어요.

그런 시기에 한 사람이 찾아와 그녀의 운명이 바뀌어 가수가 된 거죠.

바로 작곡가 정종택 씨.

원래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아주 특출나게 노래를 잘하는 아이였어요.

아버지가 그런 딸의 재능을 알아차리고 초등학생 때부터 노래 레슨을 시켰습니다.

중학생 때는 정종택 작곡가에게 레슨을 받게 해서 두 사람은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요.

중학생 때인 1975년 음반을 내기도 하죠.

세월이 흘러 작곡가는 중학생이던 소녀가 이제는 어른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해 다시 그녀를 찾은 거였습니다.

주현미 씨는 약사가 되어 있었지만, 그는 노래를 부르자고 설득했어요.

그녀는 젊은 나이에 작은 약국에 갇혀 답답하기도 했고, 그래서 그의 제안에 동의를 해서 녹음을 하게 된 거죠.

어느 날 녹음실에 간 주현미는 처음 듣는 옛날 노래를 한 번만 듣고 무려 22곡을 녹음을 하게 되었어요.

 

그게

바로 유명한 ‘쌍쌍파티’ 메들리 음반입니다.

그때부터 자가용 시대가 열려 노래를 틀면서 차를 타는 게 유행이었는데요.

빌보드 차트로 무려 300만 장 정도 판매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지금의 경제력으로 환산해 보면 거의 1000만 장 정도 판매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음반으로 인기를 얻자 그러면 가수로 한번 정식으로 데뷔해 보자 해서, 그다음 해인 1985년 ‘비 내리는 영동교’로 처음으로 방송 데뷔를 하게 돼요.

그 노래가 나오자마자 무명 시절 하나 없이 바로 스타로 급부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녀가 가수로 활동하는 것을 너무 너무 싫어하셔서, 밤업소에 나가느라 밤마다 짙은 화장의 드레스를 입고 나가는 그녀를 보며 울며불며 하다가 실신할 정도였어요.

하지만, 그녀는 집안의 빚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노래 부르는 것을 택했습니다.

물론 나중에 어머니도 그녀를 인정하고 너무나 고마워했어요.

동생들 학교 다 보내고 가족들을 다 먹여 살렸잖아요.

이때까지 약사 생활을 이어갔는데요.

1985년 9월 약국에 문을 닫고 드디어 가수 생활에 전념하게 되었어요.

전업 가수로 ‘울면서 후회하네’를 발표한 주현미 씨는 톱 스타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수가 되어서도 화교 출신이라 차별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주현미 씨가 상을 타면 ‘왜 외국 가수에게 국내 가수상을 주냐’라고 비아냥 되는 기자도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인지 그녀는 결혼을 아주 빨리 해 버렸어요.

 

최정상의

인기를 누리던 그녀는 1987년부터 지금의 남편과 당시 보기 드물게 공개 연회를 시작해 88년 2월 결혼까지 이어졌습니다.

결혼하고 나서 한국 국적을 취득한 것이죠.

88년 주현미 씨는 ‘신사동 그 사람’으로 돌아와 결혼한 이후에도 성공적인 복귀 행보를 밟게 됩니다.

84년 ‘쌍쌍파티’ 이후 사실상 90년대 초반까지 국내 여자 가수는 주현미의 시대라고 할 수 있어요.

‘신사동 그 사람’의 대히트에 힘입어 MBC, KBS, 연말 가요 대상을 동시에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고, 1989년에는 ‘짝사랑’도 히트합니다.

그 후에도 앨범을 내는 족족 히트했는데요.

1990년 ‘잠깐만’, 1991년 ‘추억으로 가는 당신’, 1992년 ‘또 만났네요’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죠.

그러나 가장 전성기에 갑자기 확 사라져버립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후 1남 1녀의 자녀를 가지게 되는데요.

어렸을 때 부모의 돌봄을 전혀 받지 못했던 그녀는 그게 한이 되었는지, 자신의 자녀들을 돌보기 위해 슬럼프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무려 7년 가까운 공백기를 갔습니다.

아이들을 키우고자 티비만 틀었다 하면 나와서 ‘수도꼭지’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는데, 1993년부터 2000년까지 공백기를 가졌어요.

갑자기 그녀가 사라지자 이 공백기에 남편과 이혼설, 온갖 소문이 난무했습니다.

다 헛소문으로 판명이 났는데요.

남편은 한국 록그룹 ‘비상구’ 보컬리스트 출신이자, 조용필 씨의 아주 유명한 밴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 기타리스트였던 임동신 씨로 1987년 발표한 ‘잃어버린 추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40일간의 미주 공연을 함께하며 친분을 쌓은 두 사람은 주현미 씨가 28살이었을 때 결혼했죠.

당시 주현미 씨는 가수 일이나, 인기를 모두 포기해도 좋을 만큼 남편을 사랑했는데요.

 

오히려

결혼 후 임동신 씨가 이를 포기하고 아내의 매니지먼트와 프로듀싱 작업을 도왔어요.

여자가 결혼하면 모든 일에서 은퇴하고 남편을 내조하는 것이 당연했던 시대에 정말 큰 결심을 했던 것이죠.

그래서 주현미 씨는 가요 대상 수상했을 때 울먹이며 남편에게 가장 먼저 감사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너무 좋은 남편을 만나 지금까지 잘 살고 있죠.

아버지한테 못 받은 사랑을 남편에게 원 없이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주현미 씨에게 정말 은인인 동시에 원수나 다름없었어요.

사실 그녀가 노래를 하게 된 것은 아버지 덕분이죠.

하지만, 아버지가 자식들을 놔두고 혼자만 외국으로 나가버리는 바람에, 그 어린 나이에 크나큰 고초를 겪게 된 거죠.

그뿐만이 아니었어요.

 

아버지가

한국에 간간이 다시 돌아왔는데 사업한다고 어머니가 모아놓은 돈을 다 들고나가기 일쑤였습니다.

집에 쌀이나 연탄마저 살 돈이 없어 외상을 지게 만들었죠.

이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고, 생활비며, 학비가 없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원망이 쌓여 아버지와 연락을 하지 않고 살고 있었어요.

그녀가 결혼하고 나서 어느 날 아버지의 친구라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아버지가 주현미 씨의 손자를 보고 싶어 한다’라고, 그녀가 거절하자 친구분은 ‘네 아버지가 아프다’라고 얘기했기도 하죠.

그런데, 그녀는 그것도 거짓말이라고 생각해 매몰차게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아버지가 일본에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주현미 씨가 더 이상 세세한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그렇게 아버지에게 냉정하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더 있을 거 같아요.

그러나 그렇게 돌아가 버리셔서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을 것 같습니다.

 

그녀는

자신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고 하며 평생 후회하고 있다고 고백했어요.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떠오른 게, ‘어떡하지’. 제가 저를 용서 못 할 일이죠”

이제 그녀는 아버지가 가장인데 화교로서 얼마나 세상을 힘들게 살았는지 이해했고, 아버지에게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용서를 빌었어요.

지금보다 당시는 더 열악한 환경이었는데요.

화교는 교육뿐만 아니라 취업도 거의 안 되었고, 승진에서도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용서를 비는 일환으로 그녀는 화교인 등 다문화 가정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고 있는지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앨범 제작에 참여하고 그 수익금을 전액 기부하는 일을 하기도 했어요.

요즘 근황으로는 ‘주현미 TV’ 등 유튜브 활동으로 직접 팬들과 소통을 하고 있고,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해 꾸준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각종 트롯 오디션이나 프로에 출연하고 최근에는 ‘불타는 트롯맨’ 레전드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모습 유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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