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서야 드러난 안정환의 눈물 고백 이야기…” 최근 그가 오열하며 공개한 안타까운 인생사를 지금 확인해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안정환의 이야기에 앞서 논두렁에서 볼 수 있는 속 빈 우렁이 껍데기가 있습니다.

우렁이

새끼들은 어미 우렁이의 속살을 빼먹고 자라기 때문에 자식이 자랄수록 엄마 우렁이는 껍질만 남게 되죠.

이처럼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자식을 위해서라면 한없이 희생하는 편으로, 마치 우렁이의 모습을 생각나게 하는데, 하지만 이 땅에는 좋은 부모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나쁜 부모도 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안정환 역시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나쁜 부모를 만나 한때 낳아주신 어머니지만,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라는 자괴감에 빠져 사실 언제 뵙는지도 기억이 안 나고 모자 관계는 완전히 끝났다고 고백한 안정환.

그의 가슴 아픈 인생에 대해 말해 보고자 합니다.

1975년 안정환이 태어나기 1년 전, 고등학교를 졸업한 안정환의 어머니 안금향 씨는 친구와 명동을 거닐다가 우연히 중학교 때 선생님이었던 안정환의 아버지 장 씨를 만나게 됩니다.

오랜만에 만난 스승과 제자는 명동 2층 중국집에서 반가움을 나눴는데, 이후 안금향 씨가 장 씨의 하숙집을 알아내 자주 들르면서 두 사람은 사랑의 감성이 싹트게 됩니다.

 

 

그러다 결국 20살의 나이로 안정환을 가지게 되었고, 하지만 당시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10살 차이로 굉장히 많은 데다, 장 씨의 건강이 좋지 않았던 탓에 친정에서는 반대가 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두 사람은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동거로 시작을 해야 했고,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건 이들의 사랑은 생각만큼 오래가지도 못했는데 당시 장 씨가 안정환이 태어나고 2년쯤 지나 암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어린 안정환은 아버지의 호적에도 오르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어머니의 성 안 씨를 따라 외삼촌의 아들로 등록을 해야 했고, 설상가상 어머니가 육아를 외할머니에게 완전히 떠넘기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바람에, 이후 외할머니와 단둘이 판자촌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을 하는 등 그의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눈물겨웠습니다.

그런데 사실 처음부터 가난했던 것은 아니고 외갓집이 원래는 잘 살았던 편으로 한참 부유했을 적에는 큰 어려움 없이 자랐지만, 안정환이 6살 때 외갓집이 사업 실패로 어려워지면서 그때부터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게 됩니다.

당시 외할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돌아가셨고, 그리고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의 유산으로 커피숍을 하다가 쫄딱 망해 다 말아먹은 뒤, 육아는 나 몰라라 하고 다른 곳을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결국 어린 안정환은 외할머니와 단둘이 굉장히 빈곤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당시 얼마나 가난했냐면 살 집이 없어서 초등학생 때부터 여기저기 얹혀사는 신세로, 한 학기에만 무려 10번 넘게 이사를 할 정도였고, 그리고 지금이야 잘생긴 외모와 패셔니스타라는 평가를 받는 안정환이지만, 당시에는 옷이 한 벌밖에 없어 일주일에 닷새씩 똑같은 옷을 입고 학교에 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같은 반 친구들이 ‘넌 옷이 그거밖에 없니’라며 놀리자, ‘나는 똑같은 옷이 다섯 벌이야’라고 해야 했고, 그리고 이때는 항상 배고팠기 때문에 소원이 슈퍼마켓 주인이 되는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먹고 싶은 걸 원 없이 마음껏 먹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축구를 시작하게 된 것도 이 때문으로, 당시 이모 집에 얹혀살던 초등학교 4학년 안정환은 학교에서 달리기를 잘하기로 유명했고, 그런데 하루는 축구부에 들어가면 빵과 우유를 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축구부로 찾아가게 됩니다.

사실 이때 안정환뿐만 아니라 보육원에서 지내거나 한쪽 부모가 없는 친구들이 그와 함께 우르르 축구부로 향했는데 왜냐하면, 시합이 끝나면 짜장면도 사준다고 하길래 결국 빵과 우유, 짜장면에 혹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때 할머니가 안정환이 축구를 하는 것을 반대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가뜩이나 잘 먹지도 못하는데 운동까지 하면 배가 더 빨리 꺼질까 봐 걱정해서였고, 그래도 축구부가 되면 앞서 얘기한 간식들이 나오기 때문에 결국 어린 안정환이 그렇게 축구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도 집이 없어 이모 집에 얹혀살면서 축구를 시작했는데, 그런데 하필 이 무렵 이모와 이모부의 부부 싸움이 잦아 항상 눈칫밥을 먹다 보니 어린 안정환이 고된 훈련을 마치고 밤늦게 이모 집으로 돌아와 문은 살짝 열고 집안의 동태를 파악하는 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부부 싸움을 크게 하는 날에는 그때는 아예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밤 11시건, 12시건 골목에 쭈그려 앉아 싸움이 잦아지기만을 기다려야만 했고, 그러면 당시 이모 집 근처의 대학생 누나들이 “어머 어린애가 왜 여기에 이러고 있니. 넌 집 없니? 이거라도 먹어”라고 하며 오다 가다 건네준 과자로 끼니를 대신하곤 했습니다.

이처럼 힘든 훈련을 마친 어린 안정환은 사실 갈 곳도, 먹을 곳도 없었고, 심지어 이때 이모가 수원으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초등학교 4학년인 그가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학교까지 무려 두 시간이나 버스를 갈아타고 가야 겨우 시간에 맞춰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얹혀살면서 새벽부터 학교에 간다고 부산을 떠는 것도 눈치가 보이고, 또한 매일 두 시간 넘게 만원 버스를 타는 것도 너무 큰 부담이 되었던 그는 결국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게 되는데, 그건 바로 ‘그냥 학교에서 자자’였습니다.

 

그가

생각해낸 곳은 학교 창고로, 결국 밤늦게 몰래 학교에 남아 창고에 숨어 잠을 청했고, 그렇게 부모에게 한창 어리광을 피울 11살의 안정환은 혼자 외롭게 학교 창고에서 잠을 청하며 이런 말도 안 되는 삶의 무게를 버텨내야 했습니다.

이처럼 열악한 환경이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노력했던 어린 안정환은 자연스레 실력으로도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그리고 운동을 하면서도 틈만 나면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만 벌 수 있다면 막노동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훗날 그의 고백에 따르면 지하철 5호선 목동역을 말도 못 하게 고생하면서 열심히 자신의 손으로 지었기 때문에, 이 역을 이용하시는 분들은 본인한테 고마워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훗날 안정환의 아내가 그가 깎은 과일이 너무나도 가지런해 놀란 적이 있었는데, 그 이유로는 축구를 하면서도 학창 시절 돈을 벌기 위해 막노동뿐만 아니라 당시 신길동 나이트클럽에서 웨이터까지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힘든 환경 속에서 축구와 아르바이트를 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던 그였지만, 그런데 당시 축구부가 아니 축구부뿐만 아니라 체육계가 워낙에 군기가 강하다 보니 안 그래도 힘든 생활에 선배들의 말도 안 되는 군기 때문에 더욱더 고달픈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한 번은 축구부원 숫자대로 지급받은 빵과 우유가 하나 비어버리자 선배 한 명이 안정환을 무려 세 시간 동안이나 군기를 주었고, 그런데 늦게 들어온 다른 선배가 ‘그거 내가 먹고 나갔는데’라고 하자, 그 한마디에 화가 나서 그 길로 합숙소를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당시 안정환은 밥 먹듯이 축구부를 이탈하고 복귀하기를 반복했고, 이와 관련해 훗날 그의 고백에 따르면 이 시기 축구가 즐거워서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그리고 이때 싸움도 많이 하고 다니던 시절이라 실제로 주먹계에서 스카웃 제의까지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막노동과 웨이터 일을 하며 심지어 선배들의 군기까지 당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지만, 그럼에도 축구를 기가 막히게 잘했던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유명 대학교에서 그를 모셔가기 위해 스카우트 전쟁이 펼쳐지곤 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그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소위 명문 대학교를 충분히 입맛대로 고를 수 있는 입장이었고, 하지만 그의 선택은 축구에서는 다소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아주대학교를 선택하게 되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에 안정환을 제외한 다른 동료들은 마땅히 갈 수 있는 대학이 없었고, 그래서 동료들과 함께 입학하는 조건으로 아주대를 택했는데, 그런데 축구 변방 아주대를 신들린 플레이로 최정상까지 이끌며 대학 축구부의 전설이 되게 됩니다.

그러자 이때 당연히 프로팀에서도 그를 눈여겨봤고, 그래서 졸업과 동시에 부산 대우에 입안해 K리그에서도 화려한 플레이와 빛나는 외모로 그야말로 최고의 축구선수로 주목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 무렵 지금의 아내 이혜원을 만나게 되는데 두 사람은 의류 브랜드 광고 촬영장에서 처음 만났고, 당시 23살의 혈기 왕성한 안정환은 미스코리아 출신 아내를 보자마자 본인의 인생 중 이렇게 광채가 나는 사람을 처음 봤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광고 촬영 내내 그의 아내는 안정환의 이미지가 바람둥이 같다는 생각에 쳐다보지도 않았고, 그럼에도 안정환은 눈부신 광채로 첫눈에 반했던 미스코리아 아내를 놓칠까 봐, 조바심이 났는지 결국 화장실을 가는 아내를 쫓아가서 ‘남자친구 있냐’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게 됩니다.

 

남자

친구가 없다는 아내의 대답에 ‘그렇다면 좋은 남자를 소개해 주겠다’라며 ‘축구 선수 누구 좋아하냐’라고 물어봤고, 그리고 단둘이 만나기는 쑥스러웠는지, 이때 이동국과 고종수를 괜한 들러리로 데리고 나가 소개팅을 핑계로 첫 데이트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안정환의 강력한 대시에 두 사람은 이내 뜨거운 사랑을 시작했고, 그런데 당시 아내는 서울에 거주하며 학교를 다니던 학생이었는데. 반면, 안정환은 뛰던 팀의 연고지가 부산이던 터라 자주 만나기가 힘들어지자, 결국 한 번은 데이트를 하다가 헤어지기 싫어서 팀 훈련까지 불참하는 사고를 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 때문에 구단에 벌금도 적지 않게 내며 선배들에게도 크게 혼이 나야 했고, 그래서 결국 안정환은 아내를 자주 만날 수 없으니 그녀에게 신용카드를 선물하며 ‘자신이 없을 때 이걸로 맛있는 걸 사 먹으라’라고 했었는데, 하지만 아내는 카드를 한 번도 쓰지 않은 채 돌려주게 됩니다.

아무튼 이유 축구 선수로서 기량에 날개가 달린 그는 2001년 이탈리아로 이적했고, 그런데 이때 축구도 축구지만 혹시라도 아내에게 다른 남자들이 관심이라도 둘까 봐, 경기와 훈련 시간을 제외하고는 전화기를 붙들고 살다 보니 당시 전화비로만 한 달에 300만 원 이상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이탈리아와 한국에서 아내와 떨어져 지내는 게 싫었던 그는 만난 지 정확히 1년째 되던 날, 아내의 집으로 365송이의 꽃을 보낸 뒤 한 통의 국제전화를 걸어서 ‘지금 이 꽃이 365송이지만 내가 10년 후엔 3650송이의 꽃을 너에게 선물할 기회를 줄 수 있어’라는 프러포즈를 마침내 하게 됩니다.

그러고 얼마 후 한국에서 만났을 때 살뜰하게 모았던 2억 원이 든 통장을 아내의 손에 쥐여주며 재차 프로포즈를 했고, 그래서 아내도 그의 진심 어린 정성과 사랑에 결혼을 결심하고 프로포즈를 받아들였지만, 그런데 당시 아내의 부모님이 운동선수와의 결혼을 극구 반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간 어떻게 사랑을 지켜왔는데 안정환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그러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처음으로 아내의 집에 인사를 드리러 가게 되었는데, 그때 예비 장인 장모님에게 운동선수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았던 긴 머리를 싹둑 자르고 나타나자 그런 안정환의 모습에 아내의 부모님들도 감동받고, 결국 두 사람의 결혼을 승낙하게 됩니다.

이처럼 안정환의 엄청 엄청난 각고의 노력 끝에 두 사람은 결혼에 골인했고, 이후 대한민국이 들썩였던 2002년 월드컵에서 안정적인 가정 덕분인지 최고의 활약을 보였던 그는 당시 몸값이 열 배나 뛰며 선수 인생 최절정에 달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무렵 모든 것이 완벽했던 그의 인생에 발목을 잡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어머니 안금향 씨로 사실 결혼 전부터 아들이 축구선수라고 떠벌리면서 도박판을 돌아다녔다가 빚이 엄청나게 불어난 통에 당시 안정환이 매번 뒤처리를 하느라고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아들의 결혼식 때도 도박 빚에 쫓겨 도망 다니느라 참석하지도 못했으며, 이후에도 안정환은 아들이라는 이유로 끊임없이 모친의 빚을 갚아주어야 했고, 그래서 월드컵 스타로 최고의 몸값을 자랑할 때도 사실 어머니의 빚을 갚느라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많은 돈을 모으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그가 선수 생활 최절정에 있던 2002년 10월, 어머니는 오랜 시간 수배를 피해 도피 생활을 하다 모텔 앞에서 검문을 받고 경찰을 차에 매단 채 달아나다가 끝내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당시 안정환의 어머니는 그 해만 6건의 사기 혐의로 검찰과 경찰의 수배를 받아왔고, 심지어 도박장에서 함께 도박을 했던 일행 김 씨의 지갑에서 현금 10만 원과 신용카드를 훔친 뒤 도주하다 이를 갚으라고 다그치는 김 씨를 되려 혼내준 혐의까지 받은 그야말로 막장 그 자체였습니다.

아무튼 오랫동안의 도망자 생활을 청산하고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되자 도망 다니는 일이 지쳤는지 당시 어머니는 ‘오히려 홀가분하다’라고 했으며, 그래서 한때는 사실 자수할 생각도 했으나, 하지만 아들한테 닥칠 파장이 걱정돼 경찰서 앞에까지 갔다가 돌아오기를 수없이 반복했었다고 했습니다.

한편, 6개월 동안 구치소 안에서 많은 생각에 잠겨 있던 안정환의 어머니는 ‘내가 왜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어, 이렇게도 험한 인생을 살고 있을까?’ 곰곰이 생각한 결과, 문득 처음 화투판에 발을 들여놓았던 때가 생각이 나게 됩니다.

 

안정환의

어머니의 고백에 따르면 사실 처음부터 도박에 빠진 건 아니고, 어느 날 알 수 없는 고통과 불안에 휩싸여 잠을 자지 못하고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다 그 무렵 주변 사람들과 우연히 화투판에 발을 들여놓은 게 잘못이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밤에 잠드는 것이 무서워서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기 위해 심심풀이로 기웃거리던 화투판은 점점 헤어날 수 없는 깊은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말았고, 그러다 결국 나중에는 자신도 모르게 어느 순간 도박 자금을 빌리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필 아들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돈을 빌리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는지 돈을 빌릴 때마다 아들을 생각해서라도 ‘이러면 안 되는데’ 자책하면서 마음을 다잡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결국 허사였다고 했습니다.

아무튼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면서도 도박의 늪에 빠져나올 수 없었던 그의 어머니는 결국 빚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더니, 눈덩이처럼 불어나 해서는 안 될 사기 행각을 벌이다가 끝내 구치소에 갇히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앞서 얘기한 데로 ‘왜 내가 이렇게 됐을까?’ 고민에 고민을 하다 보니 이번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자신이 끌려가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고, 그러자 그때 깨달은 게 이건 빙의가 아닐까 하고 의심을 품게 됩니다.

사실 이때 안정환의 어머니는 구치소에서 한때 배우 김수미도 읽었다가 빙의에 빠져버린 묘심화 스님이 쓴 책 ‘빙의’를 보고 이러한 확신을 갖게 되었고, 그래서 결국 출판사 관계자를 통해 ‘스님. 저도 빙의에 걸린 것 같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이 편지를 받은 스님이 답장을 보내면서 하는 말이 ‘빙의가 맞다. 원인은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즉 안정환의 아버지 때문이다’라며 남편의 천도제를 지내주었고, 그러자 정말 신기하게도 그때부터는 예전과 달리 홀가분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이번에는 유치장에서 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남편이 나타났고, 그런데 남편이 다정하게 웃으면서 ‘이놈의 여편네’라는 말을 한 뒤 밝은 얼굴로 쳐다보고는 홀연히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치장 생활은 힘들었는지, 이때 한다는 말이 ‘못난 엄마인데다가 지금 처지에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다만, 정한이가 마지막 배려를 해줬으면 좋겠다’라며 호소를 하자, 결국 안정환이 또다시 4억 3000만 원에 이르는 어머니의 빚을 해결해 주면서 마침내 구속 1년 2개월 만에 출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의 어머니는 앞서 얘기한 대로 부드럽게 얘기만 한 게 아니라, ‘자신의 빚을 갚아주지 않는 아들과 모자의 연을 끊겠다’, ‘빙의를 앓고 있다’, ‘자서전을 쓰겠다’, ‘머리 깎고 스님이 되겠다’ 등 난리도 아니었고, 그럼에도 안정환이 해결을 해 줬던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안정환의 어머니는 아들 덕분에 출소를 했고, 그리고 당시 출소 심정을 고백하며 했던 말이 “정한이에게 너무 미안하다. 어미로서 사죄하고 싶고, 앞으로 아들의 명성에 먹칠하지 않는 엄마가 되어야겠다는 마음뿐이다. 그리고 내가 사회에 있으면 또다시 아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으니 지금은 조용히 불자의 길을 걸으면서 공부를 하고 싶다. 물론 내가 먼저 찾아가거나 연락을 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정환이는 정환이대로 자신의 일을 잘하고 가정을 잘 꾸렸으면 좋겠다. 나도 속세를 잃고 불자의 길을 잘 걸어갈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한편, 이때 한 기자가 그의 어머니에게 ‘자식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밖으로만 나돌아다닌 철없는 엄마가 아닌가’라는 질문에 그녀가 대답하길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정말 힘들었다. 정환이와 함께 축구를 했던 선수들의 엄마나 선생님들은 다 안다. 내가 정환이를 위해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를, 당시 돈을 벌기 위해 식당 일을 하면서도 시합이 있거나 학부모 모임이 있으면 누구보다 열심히 참석했다. 나 즐기자고 자식을 내팽개친 엄마가 아니었다 그런데 나에 대해 너무나도 많이 왜곡되어 있더라’라고 했습니다.

 

또한

기자가 ‘그렇다면 도박에는 왜 빠진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녀가 대답하길, ‘내 말을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사람이 그리웠다. 평생 정환이만 바라보고 뒷바라지를 하며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정환이가 스타가 되고 나니까 내가 할 일이 없어졌다. 그래서 늘 외로웠고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우울증을 앓기도 했다. 당시 혼자 집에 있으면 뭔가에 짓눌리는 것 같아 항상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에 잠깐 그런 곳에 갔던 것이지. 도박 자체에 빠졌던 것은 아니었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그의 어머니는 속세와 인연을 끊겠다는 말을 남긴 채 마침내 조용히 사는 듯해 보였고, 하지만 세월이 흘러 2019년 방송계의 빚투 논란이 한창일 때 또다시 안금향 씨와 관련된 빚투 보도가 나오자 이에 대해 안정환이 “직접 도의적 변제는 다했다. 모자 관계는 완전히 끝이 나서 서로 안 보고 지낸 지도 한참 되었다”라고 언급하며 쓸쓸한 근황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안정환이 고백하길 “낳아주신 어머니이지만 대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할머니와 옥탑방에서 살았다. 그래서 엄마와도 크게 인연이 없었고, 사실 언제 뵙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가난한 형편에 운동에만 전념했을 뿐인데.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어머니의 빚이 모두 나에게 돌아와 어쩔 수 없이 아들인 내가 확인을 거친 뒤, 어머니께 빌린 돈이 맞을 경우 모두 변제해 드리고 집을 팔아 갚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실제로 빌리지 않았는데도, 돈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나도 내 가정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물론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의 마음은 이해하나 평생 내게 연락도 없다가 안정환이라는 빚투 보도가 나오는 것에 자괴감이 든다”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과거 안정환이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릴 적에는 어려운 형편을 많이 원망했었다.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랬다면 아마 너무 마음이 편해서 쉽게 운동을 포기했을 것 같다. 가난에는 단점도 있지만 장점도 있는 것 같다”

이처럼 그는 누구보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대한민국 축구 팬들을 위해 너무나도 많은 선물을 주었고, 지금은 비록 그라운드를 떠났지만 진심으로 고생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고, 또한 언제나 우리들의 판타지스타로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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